"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하늘이 항상 너와 함께 있다.
無貳無虞 上帝臨女(무이무우 상제림녀)
- 《시경(詩經)》 중에서"
1558년 봄, 율곡과 퇴계는 처음으로 만난다. 당시 율곡은 23세, 퇴계는 58세였다. 율곡은 천재로 불리던 젊은 학자였고, 퇴계는 당대 조선 학문의 최고봉이었다. 그런데 율곡은 퇴계를 찾아가 인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친분을 얻기 위해 찾아뵌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 묻기 위해 찾아뵈었다.” 똘똘하다고 소문난 젊은이가 찾아와 인사를 한다고 해서 기특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퇴계는 바짝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23세의 젊은 천재와 58세의 노회한 학자는 2박3일 동안 함께 지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했고 또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을 깨달았다. 이후 무수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존경심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치열한 토론도 이어졌다. 율곡은 퇴계에게 “어찌 혼자서만 편하겠다고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가?”, “명확하고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고 흐리멍덩하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라고 비판했고, 퇴계는 율곡에게 “실제적 효과에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 진정한 학문의 세계로 돌아오라.”, “늘 선배들의 글에서 틀린 곳을 찾아내 그것으로 상대방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못된 버릇을 고쳐라.”하고 비판했다. 죽은 주자가 두 사람으로 환생했다. 주자가 지녔던 두 가지 개성이 두 사람으로 나뉘어 태어났다. 그리고 주자 혼자 있을 때에는 하지 못할 일, 자신이 자신을 부정하며 비판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자가발전이 이어졌다. 주자가 스스로 자아비판을 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발전했다. 이들의 학문은 유학의 중심지를 중국에서 조선으로 바꾸어놓았다. 주자 이후 침체기에 빠진 유학이 조선에서 새롭게 꽃을 피운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정확한 이론으로 실제를 추구하는 것과 모든 것을 큰 틀에서 아우르며 포용하는 것도 서로 부딪친다. 그러나 그것이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늘을 날아갈 수 있다. 율곡과 퇴계의 부딪침은 긍정적인 부딪침이었다. 위대한 빅뱅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후배들이 이어가지 못했다. 그들 이후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고 지배층에서는 질서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예학(禮學)’을 내세웠다. ‘예학’이란 관혼상제에 대한 학문이다. 정해진 규범을 강조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이것이 너무 지나쳐 본질을 흐리고 말았다. 퇴계가 이룩한 학문[心學]이나 율곡이 이룩한 학문[理學]이 아닌, 규범과 질서만을 강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우주의 탄생에 대한 논의,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중단되고 예법만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 사이에 서양의 학문이 들어왔다. 천주교와 함께 들어왔다. 권력을 지닌 정치인은 거부했고 지식인들은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핏 생각해도 이해가 힘든 부분이 있다. 유교사상에 푹 젖어 있던 당시 지식인들이 낯선 천주교와 서양의 학문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느끼겠지만 구약성서 창세기 1장을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만들고….” 주자가 40대 시절에 엮은 책 ‘근사록(近思錄)’ 1장과 비교해보자.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지만 끝이 없는 상태를 ‘태극(太極)’이라고 말한다. 태극이 움직이자 밝고 따스한 기운이 나타났다. 이것이 양(陽)이다. 움직임이 절정에 이르자 다시 어둡고 차가운 기운이 나타났다. 이것이 음(陰)이다.” 퇴계가 평생 끼고 살았던 ‘심경(心經)’에 나오는 시(詩)와도 비교해보자.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하늘이 항상 너와 함께 있다.(無貳無虞 上帝臨女)”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창조론과 하나님(上帝)은 아주 친근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과 실용의 학문인 서학(西學)은 어떠한가.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지식을 넓혀가라.(格物致知)”는 주자의 말, “지식은 실천으로 완성된다.(窮格踐履 要須一時竝進)”는 율곡의 말은 과학적 합리주의와 연결된다.
조선의 지성인들은 드디어 ‘예학(禮學)’에서 탈출하여 퇴계와 율곡이 제시한 ‘새로운 주자학’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것을 실학(實學)이라 부른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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