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금 진 회원 (충북 음성 원당초등학교 6학년)
막 일하시다가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칼로 오이를 툭툭툭 썰고 있는 엄마를 힐끔 힐끔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계속 텔레비전에 가 있다. 그 사이 엄마는 오이를 다 썰고 이번에는 상추를 씻기 시작한다. 마음이 자꾸 쓰인다. 나도 이제 6학년인데, 내 모습은 그저 엄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가끔씩 투정도 부리면서 집안 일을 도와드리지 않고 있다. 물론 학교 숙제를 하긴 하지만 내 일 외에는 집안에서의 나는 그저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 같다.
문득 다시 엄마를 돌아다 보았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몸에 딱 달라붙은 땀에 절은 티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이끈다. 그래서 슬며시 일어나 살그머니 씽크대로 갔다. 그리고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상추를 씻고 계시는 엄마를 와락 안았다. ‘스-읍’하고 숨을 들이마시니 흙냄새가 났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농촌이기 때문에 매일 맡는 흙냄새지만 오늘 이 흙냄새는 깊이가 다르다.
요즘은 여름철이라 해가 길어 좋은 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늦게까지 놀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나를 맞아주는 건 우리 강아지 ‘소리’와 ‘봉봉이’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바쁘셔서 집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덩달아 날씨까지 더우면 애꿎은 봉봉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내 여름에 올해는 특별한 일이 생겼다. 그건 학교에서 4-H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4-H활동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꽃과 접하게 되었다. 사실 시골에 살면서 꽃을 처음 접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6학년이 되도록 꽃을 직접 심어 보거나, 또 가꾸거나 제대로 관찰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6학년이 되어서 비로소 제대로 된 꽃을 만난거나 다름없다.
추적 추적 비가 오는 날.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선생님께서 나오라는 학교 교문 앞 시내버스 승강장 옆 화단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색깔이 아주 진하고 밝은 노란 꽃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세상은 어둑어둑한 데, 꽃은 야속하게도 혼자서만 밝았다. 먼저 삽으로 흙을 부드럽게 파고, 줄을 맞춰 꽃을 배치한 뒤에 호미로 땅을 팠다. 우리 반 13명의 친구들 모두 호미질을 하는 것을 보니 나와 같이 꽃을 처음 심어보는 친구들 같았다.
처음에 힘들 것 같던 꽃 심기가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한 포기 한 포기 심다 보니 슬슬 재미가 붙었다. 어떤 친구는 포트에서 꽃을 빼 내고, 어떤 친구는 꽃을 배열하고, 또 어떤 친구는 호미로 땅을 파고, 꽃을 심다 보니 어느 새 300여 포기에 달했던 꽃을 다 심었다. 고동색에 가까운 진한 흙에 심은 노란 꽃은 마치 나비와 같았다. 이 꽃의 이름이 팬지라고 했나? 그런데 갑자기 ‘이 나비 같은 꽃에 어울리는 향은 어떤 향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가 심어 놓은 꽃에 코를 가까이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았다.
올해 어린이날에는 음성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있어 가고 싶었지만 엄마, 아빠를 따라 고추 심는 일을 했다. 그 때 심은 고추는 초록 잎이었고, 아무것도 달리지 않은 어린모였다. 어릴 때부터 줄곧 느낀건데, 학교를 오가는 길 옆 밭에서 만나는 고추를 보며 도무지 매운 향은 나지 않았었다. 그냥 푸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고추에서 매운 향이 나게 되는지….
엄마 아빠가 일하시는 곳에 따라 가서 구경만 했던 볍씨도 신기하다. 아하, 또한 못생긴 고구마도 참 기가 막히게 맛있다. 또 겨울이 오면 저쪽 마을 오르막길에 가서 비료 포대를 타고 쓩 하고 내려오는 겨울 놀이를 한다. 봄부터 겨울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 내가 살고 있는 여기 이 곳 농촌에는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처음으로 4-H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꽃의 향, 어린이날 고추를 심으며 느꼈던 고추의 향, 파릇파릇 자라 올라오는 넓은 논의 벼들의 향, 못생긴 고구마를 맛나게 먹으며 느꼈던 향, 길가에 흐드러진 망초 꽃에서 풍겨 나오는 이름 모를 향, 이런 향은 농촌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향이다.
이런 농촌의 향이 지금 나를 설레게 한다. 땀에 젖은 엄마의 등에서 풍겨나던 진한 흙냄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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