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1 격주간 제754호>
[한국4-H신문 50년 발자취]

450만 4-H인의 길잡이

[‘한국4-H소식’지 창간] 4-H회가 전국으로 확대 조직되면서 1954년 11월 농림부는 새로운 농사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농사교도보’를 반월간으로 6만부씩 발행하고 부록으로 ‘4-H뉴스’를 제공했다. 4-H활동 촉진을 위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홍보매체가 거의 없던 당시 상황에서 일선에서는 활동정보를 이 뉴스를 통해 입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8년 1월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한국4-H본부의 전신인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가 이 업무를 담당해 ‘4-H뉴스’를 발행키로 했다. 3대 발행지표는 △전국 4-H구락부 활동상황 연계보도 △4-H과제활동의 교재 제공 △4-H부원간의 펜-프랜드(Pen-Friends)의 역할 수행이었다.
하지만 재정난과 4·19혁명, 5·16 등 역사의 회오리를 거치면서 발행이 늦어졌다. 1962년 농촌진흥청이 발족되고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가 제 기능을 되찾으면서 1963년 6월 ‘한국4-H소식’지를 창간하게 되었다.

[4-H활동 정보·교양 제공] 4-H소식지에는 4-H회원 지도시책의 홍보를 비롯하여 과제이수에 필요한 학습자료, 우수활동사례 소개, 각급단위 4-H활동 소식의 전달 등 다양한 내용으로4-H운동의 종합적인 교양·기술지로서 사명을 감당했다.
그 당시의 농촌청소년들은 문화적으로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있어 자체 교양은 물론 4-H활동을 위한 자료나 정보에 대한 전달 통로를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여기에 4-H활동이 저조한 4-H회가 적지 않아 이를 소생 재기시키는데 4-H소식지가 큰 역할을 감당했다. 4-H조직 또한 크게 성장해 1968년 3만여 4-H회에 70만 회원으로 확대되었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1972년 4-H의 명칭 또한 새마을4-H구락부로 바뀌게 되었다. 1947년부터 4-H활동을 통해 성장한 청소년들이 20년이 지나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되어 새마을운동의 주역이 된 것이다. 또 1979년에는 새마을청소년회로 개칭되었고 한국4-H소식도 새마을청소년소식으로 이름을 바꿔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 새마을청소년소식지는 월 5만부에서 7만부 간행, 농촌지도기관으로 배부돼 4-H담당 지도사들이 4-H모임이나 방문지도시 나눠주면서 4-H활동을 지도하는 교육지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4-H전문지로 발전 도모] 1990년을 전후로 4-H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1988년 일명 새마을사건을 계기로 새마을청소년회에서 4-H회로 명칭을 되찾았다. 1989년도에는 그동안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었던 사업도 한국4-H후원회(현 한국4-H본부)에서 다시 관장하게 됨에 따라 ‘새마을청소년소식지’도 ‘한국4-H신보’로 발행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지령 300호를 발행하면서 4-H소식지에서 4-H전문지로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시기 4-H활동도 과거 새마을의 전시성 활동에서 벗어나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활동을 펼치는 등 재도약을 위한 과도기적 상황으로 신문의 역할이 매우 컸다.
1995년에는 한국4-H신보를 ‘한국4-H신문’으로 바꾸고 월간에서 격주간, 8면에서 12면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2002년에는 ‘농촌문화신문’으로 재창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나 4-H정론지로서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따라 16면으로 확대해 발간했다. 2010년에는 국고지원금이 크게 감소했으나 이를 발전의 계기로 삼아 신문체제를 타블로이드배판(대판)으로 확대하고 월간으로 발행해 왔다.
이처럼 지난 50년간 4-H의 길잡이 역할을 해온 한국4-H신문이 이번호(2013년 4월 1일, 통권 754호)부터 다시 격주간으로 발행하면서 재창간의 의지로 더 큰 발전을 위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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