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1 월간 제753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매와 개는 임금이 좋아하는 뇌물?
몽골은 30년 동안 고려를 침략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아낸 뒤, 100여 년 동안 고려에 여러 가지 공물을 요구했다. 그 중에는 매와 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매는 용감하고 날쌔서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냥을 위해 매를 이용하는데, 우리나라 매가 무척 뛰어났던 것이다.

매사냥 즐긴 귀족들

매는 우리나라에서 천연 기념물 제323호로 지정된 새다. 바닷가 절벽 바윗골이나 산 속의 바위틈에 번식한다. 매는 먹이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낚아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매를 이용하여 오랜 옛날부터 사냥을 해 왔다. ‘삼국사기’에 백제 아신왕이 매사냥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나올 만큼 매사냥은 크게 성행했다.
매가 사냥에 이용되는 것은 튼튼하고 빠른데다가, 쉽게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냥을 하는 매는 ‘송골매’라 부르는데, 새끼를 길들여서 사냥에 사용하는 매는 ‘보라매’ 혹은 ‘해동청’이라 부른다.
매사냥은 늦여름부터 겨울까지 하고, 하루에 보통 15마리의 꿩을 잡는다고 한다.
배가 부른 매는 사냥을 하지 않고 달아날 수 있기 때문에 먹이를 조금 주어 늘 허기지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때부터 귀족들이 매사냥을 즐겨 했다. 그래서 전국에는 ‘매봉산’, ‘매봉’, ‘응봉’ 등 ‘매’가 들어간 산 이름이 많이 있다. 서울에만 해도 은평구의 매봉산, 성동구의 응봉, 상암동의 매봉, 서초구의 매봉산 등 열 개나 된다.
그런데 ‘매’가 들어간 산 이름이 많이 있는 것은, 매사냥을 하는 매 때문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 한자가 자리 잡기 전부터 산을 뜻하는 말은 ‘뫼’였다. ‘뫼’는 ‘매’로도 읽히니, ‘매’는 ‘산’을 뜻하는 말이 된다. 그래서 산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산’의 뜻이 둘이나 셋씩 겹쳐, 매봉. 매봉산 따위의 산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몽골은 우리나라에 매사냥이 성행했고 우리나라의 매가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매를 공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몽골이 요구하는 매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몽골 조공품으로 매 길러

몽골의 무리한 요구에 조정 대신들이 매 사냥에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그 많은 매를 한꺼번에 잡아 보낼 수 없기에 고려에서는 결국 매를 잡아 기르는 관청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응방이다.
응방은 각 지방의 역과 외군에 두었는데, 몽골에서는 고려에 매잡이 관리인 ‘착응사’를 보내어 매를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응방에서는 매뿐만 아니라 개도 길렀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조공품으로 개도 보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풍산개는 사냥을 아주 잘했다.
특히 담비나 수달을 잡는 데는 그 솜씨가 귀신같았다.
몽골군은 풍산개를 이용하여 담비나 수달 사냥을 많이 했다. 몽골 기마 부대는 검은 담비 털로 외투를 만들어 입었는데, ‘카라불루간닥쿠’라고 부르는 이 옷이 수달 가죽으로 만든 옷과 함께 최고로 쳐 주었다.
매와 개는 몽골에서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었다.

고려 왕들도 사냥 즐겨

고려의 왕들은 사냥을 즐기기 때문에 매와 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래서 응방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왕에게 잘 보이려고 매와 개를 뇌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왕의 총애를 얻게 되면, 왕을 믿고 권세를 부리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제25대 충렬왕에게 매와 개를 바쳤던 윤수, 김주정, 박의 등이 그러했다.
고려가 망한 뒤에도 응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 황제가 우리나라 매를 좋아하여 해마다 수십 마리의 매를 조공품으로 바치라고 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중종 때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두 곳에만 응방을 두어, 매를 잡아 기르는 일을 맡겼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우리나라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개고기를 즐겨 먹게 되었다면서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고기 음식을 아주 즐겨 먹었다. 그래서 ‘맥적’이라는 고기구이가 유명했고, ‘삼국유사’에 김춘추가 하루에 꿩을 아홉 마리나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에 와서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다.
제24대 원종은 “왕은 짐승들에게까지 인심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니 고기 음식을 상에 올리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와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고기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나와 있듯이 몽골 사람들은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고려 사람들도 개고기를 즐겨 먹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개고기를 즐겨 먹는 풍습은 그대로 남아, ‘음식 디미방’ 등 조선 시대 음식 책에는 개고기 음식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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