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1 월간 제752호>
매화골 통신 (35) 시간이 너무도 빨리 간다
-6한 1온 한파 속에서-    이 동 희 / 소설가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이 마을은 뒷산이 높아 해가 빨리 떨어진다.
겨울에는 해가 노루꼬리만하다"

날씨가 무척 춥다. 영하 10도를 계속 밑돌고 있다.
3한 4온 우리나라 겨울 기온이 6한 1온이 됐다고 한다. 연일 한파 뉴스를 보도하고 있다. 수도 동파 사고가 많고 어쩌자고 자꾸 화재가 발생하여 더욱 추위를 느끼게 하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심야전기 보일러를 놓았는데 연속 전기값이 오른 후 부담이 적지 않다. 실은 난방비가 문제가 아니고 보일러를 잘 못 놓아 전기값만 나오지 따뜻하지가 않다. 물을 순환시키는 파이프 아래로 단열재인 스티로폼을 깔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은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집 어디에고 흙과 나무 이외에는 사용을 않은 것이다.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너와로 올렸다. 그 밑으로 송판을 깔고 황토흙을 개어 넣었다. 알매를 찌는 대신 그렇게 하고 스티로폼을 집어넣는 반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요.”
도목수인 강재국 씨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렇게 해요.”
집 주인인 그가 그대로 하라고 했지만 강목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 됩니다. 열이 땅 밑으로 다 새 나가고 말아요.”
난방이 안 된다는 것이고 방이 하나도 뜨시질 않는다고 하였다.
“상관이 없어요.”
“분명히 후회하실 낀데요. 난 책임 안 져요.”
목수는 아주 주장이 강하고 소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도 그 못지 않았다.
“예, 그래요.”
기 싸움이 아니고 위신을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목수는 공학적인 원리대로 하자는 것이고 그는 화학제품을 쓰지 않고 흙으로만 가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공임을 지불하는 사람이니까. 8년 전 얘기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놓아도 방이 하나도 따뜻하지가 않았다. 강목수 말이 맞다는 것은 그 다음 해 겨울부터 알았다. 목수 뿐이 아니고 시골 마을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만 알지도 못하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러니 이미 말한 대로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추위를 견디며 프로판가스 난로나 전열기구로 보충을 하고 있다.
명분이야 있었다. 철객(기차, 자동차)을 피해 시골로 가서 글을 쓴 전원주의도 그런 것이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얘기인가. 좌우간 너와로 올린 지붕은 함석으로 바꾸어야 했다. 흙을 많이 얹어 서까래가 약할 것 같아 그렇게 하였다. 굴피는 천년을 간다고 했는데 참나무를 쪼갠 너와는 그동안 자꾸 썩어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보일러는 다시 하기가 어려워 그냥 견디고 있다. 다시 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방 거실을 다 뜯자면 책장 옷장 등 물건들을 다 들어 내야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도무지 엄두가 안 난다. 너무 고집을 부린 것 같다. 나무 흙만 생각한 것이다. 파이프를 만든 플라스틱도 화학제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흙을 좋아했다는 얘기로나 남을지 모르겠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집필실로 쓰는 방에 북방식 온돌을 놓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남방에 웬 북방식이냐, 계속 실없다고 할지 모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지는 오래 되었다. 그러나 실속은 있어야 했다.
거실 벽을 뚫고 집필실 아래 한 쪽으로 높직한 구들을 놓는다. 시장바닥에서 가게 방에 걸터앉아 있는 난전 구들을 보았을 것이다. 거실 아궁이는 벽난로가 되고 방을 통해 나가는 고래의 연기를 뽑아내는 팬을 단다. 물론 연통은 바깥에 둔다. 그러면 벽 아궁이는 하나도 내지가 않고 거실과 방안은 온기가 전달되고 책상을 온돌의자 앞으로 끌어당겨 앉으면 전기방석보다 훨씬 따듯하고 편안할 것이다.
시와 평론을 쓰는 강릉의 권혁준 선생 내외가 물오징어를 한 박스 사가지고 와서 두면 맛이 변한다고 밤새 초고추장에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해준 이야기를 그가 발전시켜 본 것이다.
방 하나는 온돌을 놓았는데 그 때 남은 구들이 몇 장 있고 너와를 뜯어낸 것을 쌓아서 덮어 놓았다. 대비를 해놓은 것이다. 그랬지만 그것도 돈이 약차하게 든다. 몇 년 째 미루고 있다. 해동을 하고 아니 가을에나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난방이 잘 안 되어 집을 비워두는 일이 많다.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외출’로 해 두는데 그래도 10만원이 넘게 나온다.
느지막이 차에서 내려 냉골의 집으로 향하다가 길에서 광천을 만났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얼근하여 있었다.
“술 한잔 해야.”
“몇 잔 했구만 그랴.”
“가서 한 잔 더 해야.”
그냥 들어가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방금 나온 오복집으로 갔다. 이 마을 서너 개의 음식점이 있는데 여기는 짜장면과 백반을 같이 했다. 옛날 통막걸리라고 써놓았지만 옛날 얘기이고 플라스틱 병막걸리가 있다.
막걸리 하나에 두부를 시켰다. 광천은 한 살 아래고 두 살 위인 광운과 동창이다. 얼마 전 버스를 기다리는데 자꾸 가게서 입주를 하자는 것을 사양한 적이 있었다. 기차 시간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한번은 그 가게에서 다른 사람과 술을 한 잔하고 있는데 광천이 활명수인가 부인의 약을 사러 왔었다. 이 마을에는 약방이 없다. 광천에게 한 잔 권했더니 계속 눌러 앉아 일어나지를 않았다. 곽란에 약 지으러 보낸다는 말이 있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다. 부인은 황간 싱크대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술이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싣고 온 광천을 집에 데려다 준적도 있었다.
“쭉 들어 어서.”
그에게만 자꾸 권하여 술이 줄지 않았다.
이 고향 마을로 내려오면서 제일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주인 동창들이라든지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 술을 먹자고 붙들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쓰고 싶을 때 언제나 쓰고 아무 때나 잠을 자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 어떻게 마무리 하느냐. 아직 쓸 것은 많고 할 일은 주체할 수없이 많다. 시간이 너무도 빨리 간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이 마을은 뒷산이 높아 해가 빨리 떨어진다. 겨울에는 해가 노루꼬리만하다.

한국농민문학회 계간 농민문학에서는 매년 연초 농민문학 축제가 열린다. 지난 1월 24일 출판문화회관에서 전국 농민문학 작가들이 모인 가운데 시상식을 갖고 시루떡에 굴에 막걸리 파티를 하였다.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이 농촌문화상, 문단 최장수 102세 정소파 시조시인이 농민문학상 공로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앞서 수상자와 기념촬영을 하였다. 오른쪽 끝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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