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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1 월간 제7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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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한국사 이야기] 머슴, 소금 장수, 거지로 떠돌다가 왕이 된 을불 |
고구려 제14대 봉상왕은 성질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는 작은아버지 안국군과 그의 부인을 죽이고, 자신의 아우인 돌고까지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을불은 돌고의 아들이다. 봉상왕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죽이려 하자, 을불은 집에서 도망쳐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수실촌이라는 마을이었다. 을불은 이 마을에 사는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머슴살이는 힘들고 고달팠다. 음모가 어찌나 심하게 부려먹는지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는 성질마저 고약하고 괴팍해서, 밤에는 을불을 불러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개구리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구나. 밤새도록 연못가에 앉아 개구리 소리를 잠재우거라. 개구리가 울 때마다 연못에 돌을 던지란 말이야.”
주인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낮에 죽어라 일만 했는데, 밤에도 자지 못하고 연못에 돌을 던져야 했으니 사람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을불은 일 년 만에 그 집에서 뛰쳐나와 소금 장수를 시작했다.
어느 날, 을불은 소금을 팔러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가 압록강 동쪽 사수촌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을불에게 방을 빌려 준 노파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방세로 소금 한 말을 주었더니 더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을불이 이 제의를 거절하자, 노파는 자기 신을 소금 가마니 속에 몰래 넣고, 을불을 도둑으로 몰아 압록 태수에게 고발했다. 을불은 꼼짝 없이 관가에 잡혀가 소금을 빼앗기고, 엉덩이가 터지도록 곤장을 맞았다.
그 뒤 을불은 거지가 되어 동냥을 하며 살았다. 자신이 왕손이라는 것도 잊은 채 거지 떼 속에 끼여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 고구려의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폭군 봉상왕을 몰아내고, 왕손인 을불을 왕으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봉상왕은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는 폭군이었다. 게다가 의심과 시기심이 많아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왕족들을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당시에 백성들은 거듭되는 흉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봉상왕은 백성들은 돌보지 않은 채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 있었다. 국상 창조리가 아무리 간언을 해도 듣지 않았다. 창조리는 나라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봉상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자기 부하인 북부 사람 조불과 동부 사람 소우를 불러 을불을 찾아오도록 부탁했다. 조불과 소우는 을불을 찾아 고구려 땅을 샅샅이 헤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비류강 가에 이르렀다가 거지꼴을 한 젊은이를 보았다. 비록 차림새는 남루했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고, 자기들이 찾는 을불과 인상이 비슷했다. 그래서 조불과 소우는 그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넙죽 절을 했다.
“왕손이시여, 고생이 많으셨죠? 국상께서 왕손을 찾으십니다. 저희와 같이 가시지요.”
그러나 을불은 처음엔 사람을 잘못 봤다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분을 알고 나서는 그들을 믿고 국내성으로 함께 돌아왔다.
창조리는 조불과 소우를 시켜 을불을 찾은 뒤, 서기 300년(봉상왕 9년) 9월 봉상왕과 함께 후산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거사를 단행했다.
그는 사냥터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할 사람은 내가 하는 대로 하시오.” 하고 말하며 갈잎을 꺾어 모자에 꽂았다. 그러자 신하들과 장수들이 그가 하는 대로 하여, 창조리는 마침내 봉상왕을 쫓아내고 을불을 왕으로 모실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다. 을불은 머슴, 소금 장수, 거지로 떠돌다가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던 것이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거지는 우리나라에서 삼국 시대부터 있어 왔다면서요?
고구려 제15대 왕이 되는 을불은 자기를 죽이려는 봉상왕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할 때 거지가 되어 동냥을 하며 살았다고 했다. 을불의 경우를 보더라도 거지는 우리나라에서 삼국 시대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도미 부부가 백제 개루왕의 학대를 피해 고구려로 달아났을 때 거지 노릇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음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도미 부부를 가엾게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유학자 최승로가 성종 임금에게 “떠돌이 거지가 절을 찾아가 중이 되려 하는데 이는 이롭지 못한 일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는 해마다 한겨울이 되면 임금이 청계천 다리 밑으로 신하들을 보내 거지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호조에 명하여 거지들에게 쌀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거지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살펴보아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 때부터 거지가 존재했다. 거지는 전쟁이나 재난, 또는 정신박약ㆍ질병ㆍ노약 등으로 생활 능력이 없어져서 많이 생겨났다. 방랑벽을 타고났거나 게으름 때문에 거지가 된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서울의 거지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포졸들은 이들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 대신 이들로 하여금 내의원, 혜민서 등에서 약으로 필요한 뱀, 지네, 두꺼비 따위를 잡아 바치게 하거나, 부자나 고관들의 잔치나 장례 때 궂은일을 맡겨 생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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