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건널목 씨’
설이 멀지 않았다. 설을 앞둔 오늘, 여러 생각들이 피어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설날 아침은 훈김으로 시작되곤 했다.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뜨끈한 기운은 어린 나를 들뜨게 했다. 평소에는 늘 바빴던 부모님과 떡국을 먹고 세배하던 기억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다. 그런 설이 멀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의 삶은 어쩐지 각박하고 힘겹다.
맵찬 2월, 살아가는 일이 간난신고인 우리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 있다. 바로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지난 12월 말, 라디오 방송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다. 방송 원고를 다 끝낸 후에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었다. 좋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마음의 얼음덩이가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출판사 문학상을 받고 등단한지 칠 년이 됐지만 변변한 작품을 쓰지 못해 눈총을 받는 동화작가 오명랑이다. 열심히 글을 쓰지만 가족들은 오명랑 작가가 하는 일을 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 하면서 글을 쓰라는 성화에 ‘이야기 듣기 교실’을 열기로 한 후 오명랑 작가는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이야기를 찾던 중에 오명랑 작가는 ‘그동안 자신은 독자들에게 마음을 연 작가였던가’ 반성을 한다. 그리고 가슴에 깊이 박힌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는다. 책 속에서 오명랑은 말한다.
“진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려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닫아 놓고 입으로만 하는 이야기, 그러면 안 된다.…(중략)…아직 독자들에게 들려주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숨겨 둔 이야기가 있다. 부끄럽고 누추해서 숨기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준 아저씨마저 숨기면 안 되지 않나……. 나는 아직 아이들에게 아저씨만큼 따뜻한 사랑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마음만큼은 잘 전달할 자신은 있다. 나는 이야기 작가니까.” 라면서 오명랑 작가는 ‘이야기 듣기 교실’을 찾아온 세 명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목은 ‘그리운 건널목씨’였다.
이야기는 건널목 씨가 아리랑아파트 후문 앞에서 도로를 무단횡단하려고 하는 쌍둥이 형제의 팔을 꽉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건널목 씨는 배낭에 둘둘 말아서 넣어 두었던 카펫 건널목을 도로 위에 펼친 후 아이들이 안전하게 도로를 건너게 해 준다. 이 카펫 건널목은 건널목 씨가 검은 카펫에 흰색 페인트로 줄을 그어서 만들었다. 건널목 씨는 카펫 건널목을 가지고 다니다가 건널목 없는 위험한 도로를 만나면 언제든 펼쳐서 건널목을 만든다.
건널목이 없는 아리랑 아파트 후문에서 건널목 씨는 매일 아침 교통정리를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고 위로 하려고 하는 건널목 씨의 따뜻한 마음은 아리랑아파트 사람들까지도 변화시켜간다.
건널목 씨는 가정폭력 속에서 상처받는 아이 도희와 엄마가 집을 나간 사이 아빠마저 세상을 떠난 후 힘겹게 살아가는 태석, 태희 남매의 마음에도 작은 건널목을 놓아 준다. 바라는 것 없이 시린 손을 잡아주고,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보일러에 기름을 채워주는 건널목 씨에게 아이들은 큰 위안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지켜주려고 애쓰는 믿을 수 있는 ‘어른’이라는 점에서 건널목 씨는 도희와 태석, 태희에게 든든한 건널목이 될 수 있었다. 마음에 품은 그 건널목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덜 춥고, 덜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얼마 뒤 도희는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자, 건널목 씨는 도희에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는 안전한 건널목이 되어 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건널목 씨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도희는 건널목 씨에게 큰 위안을 받았음을 고마워한다.
건널목 씨가 태석이 남매에게 푸짐히 호박죽을 끓여준 어느 날, 태석이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자 건널목 씨는 건널목이 필요한 또 다른 아이들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이 책, 뒤에는 작가의 말이 붙어 있다. 그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벌써 어른이 되어 건널목 앞에 서 있습니다. 조심하면 괜찮다고, 잘 살피고 건너면 된다고, 이제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어른이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만나게 되는 반전이 있다. 그 반전으로 독자들은 가슴이 먹먹해지고 코끝을 찡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내, 가슴 가득 훈훈히 차오르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을 게 분명하다. 훈김이 가득한 책,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를 읽고 서늘한 심장 가득, 온기를 채워야 할 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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