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1 월간 제749호>
매화골 통신 (32) 살갗을 스치는 가을바람처럼
 -영동교회에서-     이 동 희 / 소설가

"북풍이 빈 들녘에 사납게 불어댄다.
겨울이 오는 것이다.
겨울, 참으로 삭막한 계절이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그렇게 비가 많이 오고 장마가 지고 냇물이 바다처럼 되어 온 마을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하고 겁을 주더니 가을에는 또 많이 가물었다. 모두들 가을 작물에 물을 길어다 주느라고 야단들이다.
배추 조금 심은 것 무 심은 골에 물을 대었다. 지하수가 있지만 동력이 필요하고 빗물만은 못하지만 수돗물을 틀어 호스로 끌고 갔다. 날이 쌀쌀해져 잎에다 찬물을 주는 대신 밭골에 흥건하도록 물을 집어넣었다. 물이 땅 속으로 잦아들기를 기다려 배추는 떡잎을 싸서 짚으로 묶었다.
서리 오기 전에 감을 또 따야 했다. 감은 따서 깎아 매달아야 한다. 곶감을 만드는 것이다. 대량으로 하는 경우는 감 깎는 기계가 있고 또 곶감 건조기도 있고 하지만 그의 집처럼 얼마 안 되는 경우는 그냥 재래식으로 손으로 메지댄다. 곶감 깎는 칼이 있고 감자 깎는 칼로 깎아도 된다. 감 껍질이 얇게 깎아진다. 물론 다른 과도로 깎으면 된다. 매다는 것도 손이 많이 간다. 껍질을 깎인 감은 직사광선이 아닌 그늘에서 달포나 말리고 여러 번 손질을 해 주어 곶감으로 태어난다.
이 마을뿐 아니고 이 근방은 호도가 많이 나는 곳인데 호도를 털고 그 겉껍질을 분리하여 씻어 말려야 하는 일은 한 달 전 쯤 추석 전후에 하였다. 곶감 속에다 호도를 넣어서 잘라놓으면 모양도 좋고 맛이 일품이다. 붉은 곶감 바탕에 흰 호도 알맹이가 꽃무늬처럼 들어박혀 디자인이라도 한 것 같고 궁합이 잘 맞는 미각을 연출한다. 뭐가 어떻든 아무 것도 가미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맛의 어울림인 것은 맞다. 촌스런 발상인지 모른다. 그것도 대량 생산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호두알이 박힌 곶감으로 쏠쏠한 농가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들깨 몇 골 심은 것을 쪄서 세워놓은 지 여러 날 되어 타작을 하였다. 깨 타작 마무리를 하는 데는 키가 필요하였다. 양이 많을 경우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키질이라는 것은 그가 할 수도 없었고 그의 식구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해 보지도 않았고 키도 없었다. 그래 또 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옆집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였다. 80이 넘은 형수뻘인 아주머니는 얼기미도 가지고 왔다. 검부러기를 걷어내고 얼기미로 친 다음 키로 한참 까불고 또 후후 입으로 불어서 그릇에 담아주기까지 한다. 참으로 고마운 것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였다. 저녁에 막걸리를 한 병 사 드렸다. 인사는 언제 자연스럽게 그런 것과 관계 없이 해야 한다. 그리고 기름을 짜려면 방앗간에 가서 다른 것을 조금 더 사서 보태야 한다. 좌우간 내 손으로 농사를 지어 먹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힘든 것 즐거움으로 자위를 한다.
농가월령가라는 것이 있다. 조선 때의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월령체 가사(歌辭)이다. 농가에서 해야 할 일을 월별로 읊고, 철에 따른 풍속과 범절을 노래한 것이다. ‘팔월령은 팔월이라 중추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로 돌아 서천을 가르치니 선선한 조석 기운 추위가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간에 들거고나…’로 시작된다. 그런 플롯으로 글을 써 보겠다는 동료(작가)가 있었는데 어쨌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와병중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노(장채) 선생이 다니러 왔다. 전에 같이 교직에 있었는데 그런 것 가지고는 성이 안 차서인가 미국으로 가서 돈을 억수로 벌었다. 지금은 그 중 대부분 날리고 연금을 받으며 노인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금년 봄에 상배를 하고 울적한 심정을 달랠 겸 온 것이다. 와서 순천만 한려수도 부산 태백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시간이 안 되어 같이 다닐 수는 없었고 지난 10월 9일 문경의 박열 의사 기념관 개관식에 같이 갔었다. 1920년대 박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옥중 로맨스, 해방과 함께 23년 만에 출옥한 항일 투사의 드라마를 기념관의 기록 사진 세미나 그리고 새재의 송이버섯 토속적인 한식 와인 등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수학과를 나온 노 선생은 70이 넘어 처음 듣는 아나키스트요 로맨스였다.
그가 미국에 갈 때는 리버사이드에 있는 안창호 유적지 동상 건립지 등을 같이 가서 찾아주고 극장을 같이 가서 통역을 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선생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가기도 했다. 애너하임에서 열린 집회-세미나와 같은 것이었다-에도 갔었다. 다른 교회와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 교회는 목사가 없었다. 돌아가면서 신언(申言)을 하였다. 설교라고 하는 일방적인 언로가 아니고 쌍방의 교통을 하였다.
회복이라는 의미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인들끼리 특별한 친분과 끈끈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남자들은 전부 형제라고 하고 여자들은 자매라고 하였다. 노선생과 지난 10월 21일 주일(일요일) 영동교회를 갔었다. 영동읍 계산로의 슈퍼 2층에 자리한 조촐한 공간이었다. 영동 일원의 교인들이 다 모이는데 승용차와 화물차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와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찬송가를 한참 부르다가 시간이 되자 조길준 형제가 먼저 일어서 ‘신언자 요나의 표적’에 대한 주제로 얘기를 시작하였다. 이어 형제 자매들이 돌아가며 신언(申言)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멘 에이맨을 연발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포도주와 전병으로 차린 ‘주의 상’을 나누는 성찬의식이 행하여 졌다. 추풍령의 강기원 형제 상촌의 이인구 형제가 주도를 하였다. 집회를 마치고는 각자 한 가지씩 가지고 온 반찬을 뷔페식으로 늘어놓고 방금 뜸이든 밥을 담아 오찬을 같이 하며 정을 나누었다.
“내세는 분명히 있는 거지요?”
그의 질문은 여기서는 너무나 각박한 것 같다.
형제들은 깝치지 말라는 듯이 동정스런 눈길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분을 믿으면 됩니다.”
밥상을 차려줘도 못 먹는 사람이 있다. 주의 상을 차려주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죽음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번 가을은 무척 짧은 것 같다. 북풍이 빈 들녘에 사납게 불어댄다. 이제 겨울이 오는 것이다. 겨울, 참으로 삭막한 계절이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쉘리의 시(詩)이든가.
시는 한 보따리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스치는 느낌을 몇 마디 한 마디라도 적는 것이다. 종교도 신앙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교리를 따지고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살갗에 스치는 가을바람 같은 것, 그것을 느끼듯이 마음에 혼에 스며드는 것, 죽음도 그런 것이고 낙원도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교회마다 조금씩의 특성이 있고 교파마다 교리가 다르다. 기독교의 경우 참으로 교파가 많다. 회복 영동교회에는 주일 오전 10시에 신언집회, 오후 1시에 기도집회, 11시 대학생 중고등부 집회를 갖고 주중 각 지역의 소그룹집회를 갖는다. 지난 21일 주의 상, 신언집회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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