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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월간 제74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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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한국사 이야기] 절벽에 굴을 뚫고 100년 동안 보관한 족보 |
1996년 음력 4월 10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송암사 옆 절벽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안동 권씨 등 의령의 여섯 성씨 문중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절벽에 굴을 뚫고 100년 동안 보관했던 족보를 개봉하였던 것이다.
먼저 산신제를 지낸 뒤, 백미터가 넘는 절벽에 사다리를 놓고 석공들이 절반쯤 올라갔다. 절벽에 박혀 있는 돌덩이를 망치로 깨뜨리자, 족보가 들어 있는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그러자 문중 대표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오동나무 상자를 동굴 속에서 꺼내 조심조심 들고 내려왔다. 오동나무 상자 속에는 여섯 성씨 문중의 족보 20여 권이 들어 있었다. 100년 만에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896년(고종 33년) 안동 권씨를 비롯한 의령의 여덟 성씨 문중 대표들은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로워지자 ‘장보계’를 만들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니 우리 족보만은 안전한 곳에 보관합시다. 100년 뒤에 나라가 평안해지면 그 때 족보를 개봉하는 거요.”
이렇게 결의한 문중 대표들은 족보를 옻칠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절벽에 보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쳐내려온 인민군들이 절벽에 총기를 난사하여 그 입구가 부서진 적이 있었다. 그때 청주 한씨와 현풍 곽씨 문중의 족보가 훼손되어, 나머지 여섯 성씨 문중의 족보만 그대로 보관해 왔던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그 뒤에 만들어진 족보 30여 권도 함께 오동나무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100년 뒤인 2096년에 다시 족보를 개봉하자고 하며, 절벽의 동굴 속에 오동나무 상자를 넣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옛날 사람들이 족보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먼 훗날까지 후손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지 알았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가는 경우에도 자기 가문의 족보부터 챙겼으니까.
족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명문 가문뿐 아니라 무명 가문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다투어 만들었다. 족보가 있어야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고, 족보가 없으면 벼슬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차별이 철폐된 뒤에는 성이 없던 천민 출신의 사람들이 양반 성을 갖고, 가짜 족보를 만들어 양반 행세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말에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족보 없는 같은 성의 사람들을 찾아내 족보를 파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회안대군 방간의 후손들은 왕실 족보에 다시 오르기 위해 300여 년 동안 싸운 적이 있었다.
회안대군 방간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바로 밑의 동생인 방원과 임금의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방원에게 져서 역적으로 몰려 자신은 서산으로 귀양을 가서 죽고, 자기를 도운 박포는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방간은 역모를 꾸몄다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다.
태조 방원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 방간의 후손들은, 왕실 족보에 다시 오르기 위해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다. 역모를 꾸민 것은 박포이고, 방간을 끌어들여 억울하게 희생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선조, 광해군 등 임금이 바뀔 때마다 상소문을 올려 명예 회복을 시켜 달라고 했다. 그 끈질긴 탄원은 300여 년 만인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여져, 새로운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부터 다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족보에 오른 조상 1400명의 이름을 외운 뉴질랜드 마오리족 추장이 있었다면서요?
뉴질랜드는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호주’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옆에 있다. 뉴질랜드는 남섬과 북섬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섬은 ‘마우이 섬’이라 불리고 있다. 이 섬은 바다의 신 탕가로아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마우이가 바다 깊이 낚싯바늘을 드리웠다가 낚아 올렸다고 한다. 그것은 ‘하하우 호에누아’라는 물고기였는데 ‘찾아 헤매던 육지’라는 뜻이다.
뉴질랜드에는 90% 이상이 백인이고 나머지가 마오리족이다. 마오리족은 백인들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살았던 원주민이다. 고고학자들은 마오리족이 쿡 제도 또는 소시에테 제도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해 왔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백인들은 1840년 마오리족 추장들과 조약을 맺어 서로 사이좋게 살고 있다.
어느 날, 마오리족 추장 한 사람이 뉴질랜드 토지위원회에 나갔다. 자기네 부족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마오리족은 아주 오랜 옛날에 뉴질랜드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 때 처음 이 땅에 첫발을 내딛은 선조할아버지가 쿠페입니다.”
추장은 이렇게 운을 떼더니 그 자리에서 쿠페로부터 39세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직계 조상과 그 조상들의 친척까지 모두 1400명의 이름을 3일 동안 줄줄이 외웠다. 마오리족은 문자가 없어 족보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중에는 10대 이상의 조상 이름을 외우는 사람들이 아주 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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