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1 월간 제749호>
[4-H인의 필독서] 신경림 엮음 ‘처음처럼’

마음과 생각의 그릇을 넓히는 사색(思索)

 앗! 어느새 11월이라니. 시간이 어쩌자고 이렇게 속도를 내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작은 환상이 하나 있었다. 나이가 들면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져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해보면 참 순진하고 어리석은 착각이지만, 나이 먹는 것을 겁내지 않게 한 어떤 힘이 되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살면서 깨달은 더 중요한 사실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생각이 저절로 깊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색이다. 좋은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할 때 마음과 생각이 깊어진다.
이처럼 나를 좀 더 성장시키고 싶을 때, 생각의 깊이를 지니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 있다. 바로 ‘내 인생의 첫 떨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앤솔러지 시집 ‘처음처럼’(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펴냄)이다.
이 책의 서문에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시로는 돈을 벌지도 못하고 쌀을 생산하지도 못하며 자동차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벌고 쌀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그 주체인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답게 살게 만든다.”
그렇다. 시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답게 살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렵고 골치 아픈 것으로 여기고 있다.
대체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지만, 신경림 시인은 그것이 시인의 책임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한편, 시가 읽히지 않는 데는 일정 부분 시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시를 써 놓고 독자한테만 안 읽어 주어 야속하다고 탄식한들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 앤솔러지(짧고 우수한 시의 선집, 특히 여러 작가의 시를 모은 것)는 우리 시를 좀 더 읽히는 것을 목표로 해서 편집되었다. 시 선정은 ‘소리 내어 읽고 싶은’이라는 수식 그대로 거의 내가 평소에 외고 있는 시들 중 가장 자주 암송하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
이 앤솔러지 시집에는 모두 쉰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우리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를 한 권의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들이 들어 있을까?
백석의 시 ‘주막’, 정지용의 시 ‘다알리아’, 서정주의 시 ‘동천’,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 이용악의 시 ‘슬픈 사람들끼리’, 문정희의 시 ‘겨울 사랑’,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 정희성의 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 등이 들어 있다.
이 책에 실린 쉰 편의 시들에는 신경림 시인의 생각이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달려 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을 이뤄낸다.
거기다가 다섯 명의 화가가 작업한 그림이 한 편의 시와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다. 소리 내어 읽는다면 눈과 귀를 모두 즐겁게 할 책이다.

“장미밭이다. / 붉은 꽃잎 바로 옆에 / 푸른 잎이 우거져 / 가시도 햇살 받고 / 서슬이 푸르렀다. // 춤을 추리라, / 벌거숭이 그대로 / 춤을 추리라, / 눈물에 씻기운 / 발을 뻗고서 / 붉은 해가 지도록 / 춤을 추리라. // 장미밭이다. / 핏방울 지면 / 꽃잎이 먹고 / 푸른 잎을 두르고 / 기진하면은 / 가시마다 / 살이 묻은 / 꽃이 피리라.”
 - 송욱, ‘장미’ 전문

이 한 편의 시에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있다.
“시는 뜻으로 읽지 않고 느낌으로 읽어야 할 때가 있다. 이 시 역시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 내용은 뜨거운 대낮에 핀 새빨간 장미와 짙푸른 잎이 전부이지만, 무언가 강렬하고 치열하고 짙다. 원색적인 색채와 단음절로 끝나는 강렬한 리듬이 이 시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원색적인 색채와 단음절로 끝나는 강렬한 리듬을 지닌, 송욱의 시 ‘장미’는 외우기 좋은 시로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시를 한 번 읽고 해설을 보고는 다시 시로 돌아와 읽으니 처음 읽은 이 시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외우는 것은 무조건 자신 없어 하는 나도 외울 수 있을 것 같기만 하다.
가을이 멀어지고 있다. 겨울로 성큼 들어서는 요즘이다. 이 계절, 한 편의 시를 통해서 세상을 만나보면 어떨까?
한 편의 시에는 누군가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은 물론이고 현실의 고단한 일상도 들어 있다. 그 모든 세상과 만나고 싶은 그대에게, 조금은 편안하고 쉽게 시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책, 앤솔러지 시집 ‘처음처럼’을 두 손으로 받쳐 공손히 선물하고 싶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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