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1 월간 제748호>
매화골 통신 (31) 민족 대이동 벌초 추석
-학산에서 학을 보며-     이 동 희 / 소설가

"더러는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벌초는 추석 전의 큰 일 중의 하나다.
해마다 겪는 것이다. 전에도 얘기를 했었는데 하루 날을 잡아 다 모여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달 전부터 서로 시간을 맞춘다. 그의 집안의 경우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추석 2주 전 토요일로 하는 것으로 했다. 그래서 그 날 비가 많이 오면 한 주일 늦출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도 비가 오면 비를 맞고도 해야 한다. 이상하게 벌초할 때마다 비가 안 오는 적이 없었다. 이때가 우기를 지나는 시기이고 대개 태풍이 통과하는 때여서 그런 것이다. 추석은 그런 풍파 뒤의 맑은 일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일로 날을 잡아서 놉을 네 사람을 얻고 두 군데로 나누어서 예초기를 하나씩 짊어지고 아침 8시 전에 산으로 출발하였다.
조카 재후가 먼 코스인 석지양지쪽으로 가고 그는 미역뱅이로 갔다.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큰할아버지(종조부) 산소가 있고 집안 여러 산소가 있다. 더러는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에게 어떻게 되는 묘인지 모르는 것이 여럿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그가 제일 나은 편이다. 낫다는 것은 그래도 제일 많이 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0살부터만 쳐도 30년 이상 매년 따라다닌 것이다. 하나 하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메모해 두고 사진도 찍어두고 하였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된다. 그의 할아버지 묘를 잊어버릴까 염려가 되어 그 때 무거운 플래시 카메라를 메고 올라가 여러 장 찍어두었었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넣어서 이쪽에서도 찍고 저쪽에서도 찍고 하여 정말 못 찾을 경우 그 사진을 보고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몇 십 년을 다녀 위치를 빤히 잘 알게 된데다가 어머니 묘를 그 앞 산자락에 썼고 아버지 묘를 어머니 묘 옆에 나란히 이장해 놓았다. 그 아래에 큰형님 작은형님 묘를 써 놓았고 한식이다 벌초다 성묘다 하여 잊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 같다. 결국 그의 직계의 묘만 안다는 것이다.
미역뱅이에서 제일 먼저 벌초를 하게 되는 재욱이 재학이 부모의 묘라든지 건너 편 산의 재하 부모 묘라든지 몇 산소 외에는 잘 모르고 풀만 깎는다. 풀도 잘 자라지 못하고 가꾸지 못하여 대부분 깎을 풀도 없고 한 쪽이 푹 꺼져 있다. 예초기를 들이댈 것도 없는 것이 많다. 최근에 쓴 두 형들의 묘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묘 말고는 다 그렇다.
놉도 매년 같은 사람들이다. 품앗이라고 할까 친분으로 해주는 일이다. 다른 것이야 어떻게 되었든 비를 맞고 산속을 헤맨다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다. 하루 종일 하는 것은 아니고 대개 1시 안에 끝내고 내려와 점심을 마을 앞 식당에서 하게 된다. 전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갔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하고 큰 병 소주에다 안주 겸 김밥을 몇 줄 가져가 먹으며 일을 한다. 그러니 무슨 술이다 곁들이다 하는 멋은 없고 목을 축이고 요기를 하는 최소한의 공급인 것이다. 짊어지고 다니는 짐을 좀 가볍게 하는 것도 있긴 하다.
늘 하는 단골 놉들이 되어 부끄러움이 좀 덜하다고 할까, 모르는 묘가 태반이고 위치도 몰라서 오히려 그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또 위로가 되라고 말한다.
“요즘 너나없이 다 그래여.”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년 와도 찾기가 어려운데 가물에 콩 나듯이 오니 못 찾고 잊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왔고 한참 일을 하는데 조카들이 왔다. 벌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묘도 한다. 추석에는 길이 막혀 못 오니 미리 성묘를 하고 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핑계이고 열흘 보름 상간에 두 번 걸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지 않고 제대로 예의를 차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설 추석의 민족 대이동이 그런 것이다.
그날 그의 장조카는 점심시간이나 되어 왔다. 늦은 대로 올라가 성묘를 하고 오도록 하였다. 길이 꽉 막혀 고속도로는 주차장이었다고 한다. 추석만 그런 것이 아니고 벌초 때도 그랬다. 피크인 날이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학산(鶴山)에 학을 보러 갔었다.
왜가리 백로 떼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여기 노천리 내 건너에도 학이 내리는데 그의 귀향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물론 부모님 묘 옆에 있고 싶어서가 먼저이지만. 같이 소설을 쓰는 후배와 같이 가게 되었다.
영동군 학산면 봉림리 미촌마을, 거기 60여 년째 수백 마리의 왜가리와 백로 떼가 마을 뒷산을 찾아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해가 넘어갈 때 학의 무리가 내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달래 학산이겠어요.”
돌아가는 길에는 후배의 권유로 그곳 범화리의 한 귀농인을 만나게 되었다.
학생이 없어 폐교가 된 학교 운동장 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받아가고 있었다. 일라이트(illite)물이었다. 정제수(삼이원식품) 회장이 18세에 고향을 떠났다가 2006년 40년 만에 돌아와 일군 것이었다. 범화초등학교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고-그것은 부친이 지난 1941년 학교 설립에 쓰라고 영동군에 기증한 땅이었다-일본식 발효식품 낫토(納豆)를 생산하기 위해 우물을 파다가 학교 옆 2백여 미터 땅 속에서 물줄기를 찾은 것이다. 수질 검사를 해보니 시중 생수보다 미네랄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이 지역에 매장돼 있는 희귀 광물인 견운모(일라이트)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천연수였다. 기적이었으며 집념의 소산이었다. 그 물로 인해 낫토 공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갈수(渴水)로 시달리는 주민들이 마음대로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PH 8.0의 알칼리성을 띠는 이곳 물이 아토피 건선 십이지장 치료 등 여러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학계에 보고되면서 외지에서도 한 주에 2, 3백여 대의 차량이 몰려와 물을 받아간다고 한다.
범화교회 장로이며 청주 상당교회 정삼수 목사의 막내 동생인 정 회장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의 물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생명수였다.
정 회장이 콸콸 솟아오르는 일라이트 생수를 따라주는 대로 받아 마시며 학이 내리는 장관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마을 앞 냇물이 겁나게 불었다. 삼도봉 민주지산 각호산 등에서 4개의 태풍 속에 쉬지 않고 내린 빗물이 골짜기마다 흘러내려 위협을 하며 내려가고 있다. 황악산 곤천산 그리고 이쪽 미역뱅이 토실 골짜기 물이 합쳐져 흐르는 이곳 매곡 면소재지 앞에 이르면 내가 아니고 바다이다. 마을 이름이 노천(老川)이다. 이 물이 황간 심천을 거쳐 금강으로 간다.
목록
 

간단의견
이전기사   [남양주 연세중학교4-H회] 사랑으로 양념한 배추김치로 어려운 이웃 도와
다음기사   한국의 4-H운동, 덕유산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