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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1 월간 제74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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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골 통신 (25) 귀경재 4계 |
- 7년차 반거충이 - 이 동 희 / 소설가
"값을 따지면 채산이 맞지 않으나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 하면
질척한 인심이 남는다."
귀농의 인구가 늘고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고 얼마 전 도하 언론에 농촌으로 들어가는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고 보도했었다. 농림수산식품부 집계를 가지고 하는 얘기였는데 지난 해 귀농인구가 6500여 가구가 된다고 하였다. 인구의 숫자로는 2만여 명을 넘어섰다.
귀농 인구는 2004년에 1000가구를 넘어선 후 2007년 2384가구 2009년 4080 가구 그리고 지난 해 2011년에 6500가구로 급증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에서 1963년 사이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귀농인구를 직업별로 보면 일반 직장 은퇴자, 자영업자, 제대 직업군인 순이었다. 조성보 귀농협의회 회장도 직업군인으로 제대한 경우였다.
한동안 귀농 얘기가 화제가 되었었다.
귀농은 물론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이유에서 농촌으로 시골로 내려와 사는 경우가 있다. 글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작품을 위해서 노년에 낙향을 하기도 한다. 맑고 시원하고 쾌적한 공간의 아름다운 농어촌 풍광에서 작품제작이 잘될 것이다. 다 늙고 기력이 없을 때가 아니고 젊고 발랄할 때 내려와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기도 한다. 폐교된 농촌 초등학교 같은 것을 사서 화실로 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원 없이 크고 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림만이 아니고 연극 연습을 하는 극단도 있다. 어디 미술 연극뿐이겠는가.
무슨 얘길 하려고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그도 귀농에 속하였다. 귀농 귀향 귀촌 중에 하나를 말하라면 귀향에 속할지 모른다. 농토는 한 마지기도 없다. 한 마지기를 우리 지역에서는 200평을 말한다. 집에 딸린 텃밭이 그 보다는 많지만 텃밭을 농토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집도 적잖이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마지기 농토도 없다. 그들이 붙이던 논을 사려고 했지만 살 수가 없었다. 값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남의 물건을 억지로 살 수는 없었다.
학교(매곡초등학교)앞 새천가 논이었다. 그 논 가에 큰 바위가 박혀 있었다. 길 가였다. 펑퍼짐한 바위가 경사가 급하게 누워 있었는데 거기서 아이들이 미끄럼을 탔다. 그 바위를 캐어다 마을 우체국 표지판을 하여 놓았는데 논 대신 그 돌을 갖고자 하였으나 그것도 안 되었다. 어떻든 논밭은 한 뙤기도 없고 텃밭이라고 할까 마당은 풀이 수북이 나 있었다.
한 옆으로 매실나무를 10여 그루 심었다. 6, 7년 되어 밑동이 두 뼘으로 다 쥐어지지 않게 자랐고 매실도 꽤 열렸다. 드문드문 감나무도 심고 호두나무도 심었다. 전에 있던 나무 앞에 덧심어 놓은 것이다. 늙은 나무가 쓰러지면 대신할 것이었다. 밤, 석류, 자두나무도 한 그루씩 심어 놓아 첫 열매를 보았다. 뽕나무도 심어 누에를 먹이는 대신 뽕잎차를 원 없이 만들었다. 곳곳에 꽃나무도 심어 놓았다. 라일락, 백일홍, 무궁화, 넝쿨장미, 단풍나무 그리고 화단 가에는 5월 늦게 피는 영산홍을 주욱 심어 마당과 경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담과 울타리 대신 쥐똥나무를 심어 겨울이면 잎이 없이 훤하게 3계절은 무성하고 노란 꽃 까만 열매에 향기가 좋고 꿀벌이 꾄다.
작년에는 옥수수, 들깨, 무, 배추를 심었다. 귀향 후 처음으로 김장을 하였다. 5명 가족의 딸에게도 주었다. 그렇게 많은 양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도 사지 않고 온전히 농사지은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알고 보니 김장 풍년이었다. 그러니 자연 값도 쌀 수밖에 없었다.
값을 따지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 식품을 생산한다고 생각하기보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 하면 오히려 질척한 인심이 남는다. 배추 모종은 앞집 앞집 이문세 동창이 그냥 준 것이었다. 풀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비닐을 씌웠었는데 그것은 아래 뜸 백운학 동창이 쓰던 것을 또 주어 뚫려 있는 구멍에 씨앗을 넣고 모종을 심었다. 동창뿐이 아니고 이웃 노인들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가르쳐 주고 일도 해 주었다. 뒷집 임차영 할머니는 깨타작을 해 주고 옆집 박우용 할머니(형수)는 키로 까불어 주었다. 다 8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재작년에는 서리태 콩을 심었었다. 호박은 빈터에 여러 포기 심었고 상치, 쑥갓, 고추, 파 등은 밑반찬과 같이 늘 심는다. 도라지를 심었다 옮겨 심은 것이 풀을 맬 수가 없어 보기 좋은 보랏빛 꽃이 묻히고 매실나무 밑에 간작으로 심는 결명자차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농산물이다. 한참 주어 섬겼는데 그래도 빠진 게 있을 것이다.
“나도 농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생은 그러면 자기는 농민이냐고 되묻는다. 물론 그렇다고 하였다.
그의 집 뒤는 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경사가 급하고 높아 아기자기하지는 않은 대로 뒤로 연한 값없는 자연 공간이다. 그 산 밑에 대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제일 매력 있는 존재이다. 쭉쭉 뻗은 대나무 숲. 죽림칠현(竹林七賢)이란 말이 있지만 칠현은 어떻게 되었든 죽림 자체가 값지게 생각되었다. 그래 잿말 들판에 있는 박내곤 동창(초등학교 동창이 여럿이었다) 밭에서 흐드러진 대나무를 캐다가 보식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재미를 못 보았고 수원리 화가 매봉 선생이 오죽(烏竹)을 캐 주어 창문 앞에 심은 것이 두 길은 자라 죽림을 이루어 가고 있다.
멋이 아니라 오기이며 실리이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밭가에 있는 대나무도 그 강하게 뻗는 뿌리 때문에 다 캐내고 집 옆에 있는 대나무도 그런 이유로 금기시한다. 그러나 그는 죽림 지향주의자이며 대나무 밭에는 지진이 없다는 과학적 근거를 존중하는 것이다.
흙집을 지어 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를 싫어하여 흙벽돌로 벽을 쌓아 집을 지었다. 지붕은 너와로 하였다. 보일러 파이프를 설치할 때 단열제 스티로폼도 깔지 않았다. 그래서 난방이 잘 안 되는 대로 화학제품을 거부한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자연 속에 흙 속에 살고 싶었던 것이다.
상량문에 어머니 104세 아버지 100세 생월에 흙집 3간을 짓고 돌아와 밭을 갈며 글을 쓰겠다고 썼다. 겉멋을 부려 귀경재(歸耕齋)라고 하였다. 매봉 선생이 먹을 갈아 써 주었다. 2층에는 대들보에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에서 몇 대목을 썼다. 부귀영화는 내 바라는 바 아니었고 신선 사는 곳도 기약할 수 없는 일(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2층은 앞산 황악산 정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직지사 뒷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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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그도 7년차 반거충이 농민이다. 농토는 한 마지기도 없다. 그러나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무엇을 심고 거두고 한다. 돈으로 따지면 채산이 안 맞는다. 식품 생산이라기보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 계산하면 인심이 남는다. 사진은 영동군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인협의회 연시총회를 마치고 조성보 회장이 부회장과 임원들을 소개하고 있는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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