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에 담자 들꽃은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운동은 저축되지 않는다.’는 지인의 충고에 따라,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바쁜 아침 시간에 하는 운동이라 30분정도 걸어간 후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1시간쯤 가벼운 산책을 한다. 주로 걷는 곳은 ‘성북천’변이다. 이곳을 산책하며 얻게 된 가장 큰 즐거움은 다양한 식물과 만나는 일이다. 풀과 꽃 사이로 난 길을 걷다보면, 마음속까지 상쾌함이 밀려든다. 꽃들은 피고 또 핀다. 피어나고 지면서 열매를 남긴다. 이 사실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다.
산책길에 만난 꽃과 풀들을 떠올리며 책장에서 ‘우리꽃 답사기’(김태정 / 현암사)를 꺼내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꽃 찾기에 인생을 건 김태정 박사(한국야생화연구소 소장)다. ‘우리꽃 답사기’에는 우리 꽃에 인생을 걸고 30여 년 동안 야생화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닌 저자의 열정과 야생화 사랑이 온전히 담겨 있다. 그는 보고 싶은 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거기가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고 한다. 민통선 북방지역은 물론이고 서해 외연열도, 백두산 곳곳, 남녘의 한라산과 거문도, 동녘 끝 독도와 북한의 산하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수입 없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꽃에 대한 연구를 해온 저자의 생활고는 만만치 않았다. 1987년, 90일 동안의 ‘민통선 북방지역 학술 조사’를 앞두고는 슬라이드 필름을 살 돈이 없어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촬영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린다. 그 와중에 눈이 보이지 않아 병원을 찾은 저자는 백내장 판정을 받는다. 지인의 도움으로 백내장 제거 수술은 했지만 인공수정체를 삽입하지 않아 아예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2000년대 초, 안과를 찾았다가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인공수정체를 넣으려고 안과를 찾았더니 수술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인공수정체를 삽입할 자리의 막이 손상되어 절대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희망이 없었다. 평생 한쪽 눈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제 눈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저자는 그런 고생이 있었기에 많은 자료를 모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 얻은 것은 자료뿐 아니라 ‘같이 고생한 분들과 지금도 옛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우리 꽃 답사기’에는 야생화를 찾아다니며, 때로는 고생스럽고, 때로는 감격에 넘쳤던 그 순간순간이 담겨 있다. 해란초를 찾으러 다니다 이런 일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삼척항으로 들어서기 전 외진 바닷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길가에 자주색 옷감을 펴놓은 듯 눈부시게 피어난 꽃들. 개쑥부쟁이였다. 그 화려함을 누가 눈여겨봐준 적이 있을까. 우리가 땅바닥에 엎드려 촬영하고 있으려니 지나던 할머니 한 분이 그게 뭐 하는 거냐고 물으셨다. 꽃을 찍는다고 하니 그까짓 흔해 빠진 걸 뭐 하러 찍나 하며 혀를 쯧쯧 차셨다. 잠시 후에 그 곳 마을의 이장이나 되는 사람이 나타나 이곳에서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는데 허가 받고 찍느냐고 큰소리를 친다.”
야생화를 찾아 전국을 다니며, 이런 저런 괄시도 많이 받았지만 그저 꽃 한 송이를 찾아내 카메라에 담고 나면 그 모든 시름이 날아갔다고 한다. 저자는 해란초를 찍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곳을 찾아다녔지만 찍지 못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바닷가가 아닌 야생화연구회 회원의 연구소에서 찍게 된다. 서울 근교 연구소에 피어난 해란초와 갯패랭이를 찍으러 간 저자의 눈에는 그 꽃들이 자신의 소원을 풀어주려고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사진을 찍어온 나였지만 갯패랭이꽃을 만나자니 가슴이 설레었다. 수많은 꽃을 달고 깨끗하게 피어난 해란초를 현상한 사진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느 시인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다고 노래했다. 나는 한 송이 꽃을 찾아 수천 킬로미터씩 돌아다녔다.”
저자는 그때 찍은 해란초와 갯패랭이꽃 슬라이드를 볼 때마다 꽃 때문에 겪은 고생스러웠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이 교차한다면서, 자신이 쓴 책에 들어 있는 수많은 꽃 사진은 모두 자신의 인내와 땀 그리고 시간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꽃 답사기’를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한 여러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남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그 이름을 불러 줬으며, 널리 알리기까지 한 저자의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꿈꾸는가? 무엇에 미칠 수 있는가? 무엇으로 행복한가? 인생의 길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삶에 지쳤다면, 이 책을 꼭 읽길 바란다.
그리하여 책장마다 솟아나는 치열함과 맨 얼굴로 대면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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