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광해군 2년) 7월 1일,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우의정 심희수 등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여러 대신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까닭은 엉뚱한 요구를 하는 명나라 사신 때문이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간 원접사가 서신을 보내 왔소. 이번에 왕세자 책봉문을 전하러 우리나라에 온 사신은 염등이라는 자인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오. 그자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가 지나가는 곳에 은으로 다리를 놓아 달라는 거요. 그 다리를 건너 서울 남대문에 와서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겠다는 말인데……. 사신들의 횡포가 날로 더해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갖가지 핑계로 뇌물 요구해
광해군이 이렇게 말하자 영의정 이덕형이 입을 열었다.
“그게 다 뇌물을 더 뜯어 가겠다는 수작이지요. 지난해에 사신으로 왔던 유용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우리 조선 땅에 와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뇌물을 챙겨 갔는지 염등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서울에 와서 책봉문을 펼쳐 들고 읽을 때에 유용과 마찬가지로 뇌물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의정 심희수가 맞장구치며 말했다.
“요즘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지나는 곳에 은으로 다리를 놓아 달라니, 이 무슨 해괴한 요구입니까? 그자는 분명 서울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뇌물을 요구해 자기 욕심대로 기어코 은 5만 냥을 채우려 들 것입니다.”
명나라 사신 염등은 왕세자의 책봉식에서 명나라 황제의 왕세자 책봉문을 전하러 조선에 온 것이다. 그 전 해인 1609년(광해군 1년)에는 광해군을 왕으로 봉하는 책봉문을 전하러 유용이 사신으로 왔는데, 그는 중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조선에 가면 반드시 은 10만 냥을 뇌물로 받아 내리라.”하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는 조선에 와서 그는 “나를 접대할 필요 없다. 대신 그 비용으로 은이나 바쳐라.”하고 결국 6만 냥을 뜯어내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염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치 유용과 경쟁하듯 뇌물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왔는데, 평안도 관찰사에게는 4천여 냥, 황해도 관찰사에게는 2천600여 냥의 은을 얻었다. 하지만 유용이 받았던 금액보다는 적었기 때문에 벌컥 화를 내며 접대하는 조선인 관리에게 곤장을 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임진강의 배다리가 장마 때문에 떠내려갔는데, 염등은 이 일을 알고 행차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벌금으로 은 1천 냥을 뜯어내기도 했다.
잇속 채우기에 급급해
염등은 이처럼 갖가지 핑계를 대며 은을 요구해 수만 냥을 거두어갔다. 다른 사신들처럼 그도 조선에 와서 한 밑천 잡아간 것이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을 제쳐 두고 왕이 되었다고, 명나라에서 즉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명나라에서는 진상을 조사한다며 엄일괴, 만애민을 사신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이때 그들에게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받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신들이 요구하는 은 수만 냥을 뇌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조선은 사신들이 가서 한 밑천 잡는 곳으로 명나라에 알려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명나라 세도가에게 은 수만 냥을 뇌물로 바치고 사신이 되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날마다 은 1만 냥을 달라고 보챘는데, 조정에서 그를 위해 준비한 은이 무려 13만 냥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큰 나라인 명나라를 받들어 섬기었다. 왕의 즉위는 물론 왕세자 책봉까지도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황제의 지시를 받고 왔다는 명나라 사신들이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수만 냥의 은을 뇌물로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신현배/아동문학가, 시인〉
♠“뇌물을 한 푼도 받지 않은 명나라 사신도 있었다면서요?”
1625년(인조 3년) 조선에 온 사신 가운데 강왈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림원 학사였는데, 뇌물을 요구하기는커녕 조정에서 사신을 예우하기 위해 준비한 예물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사신을 맞이하러 원접사로 나간 김류는 이런 일은 처음이어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하지만 강왈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 대접을 잘 받아 배부르면 됐지, 예물은 무슨 예물이오. 예물이나 뇌물 때문에 백성들을 빈곤에 빠뜨려서야 되겠소.”하고 말해 김류를 감격시켰다.
강왈광의 청렴함이 알려지자 조선 사람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가 서울을 떠날 때는 무려 1만 5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고 한다.
그를 보려고 100리 길을 걸어 3일 전에 와서 기다린 백성도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이 뇌물을 요구하며 얼마나 많은 횡포를 부렸으면 뇌물을 받지 않은 강왈광의 행동이 온 나라에 이슈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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