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1 월간 제728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거머리로 종기 치료를 받은 중종

종기 때문에 목숨 잃은 왕들도 많아

요즘에는 종기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질환이지만 과거에는 종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 제11대 왕 중종은 종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왕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만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1533년(중종 28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가 나서 심하게 부풀어 오른 환부에 침을 맞았는데 고름이 쏟아져 나왔다. 왕의 치료를 맡은 내의원에서는 고약을 만들어 정성스레 매일매일 붙였다. 하지만 효험이 별로 없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의원에서는 이런 저런 의학서와 민간요법을 총동원해 중종의 종기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고 결국 거머리를 이용한 치료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고약 붙여도 효험 없어

중종 28년 2월 6일, 내의원 제조 장순손은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하, 사람 몸의 혈기는 피부 속에 있으니 이는 나무 진액이 껍질 안에서 오르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혈기는 한계가 있어서 보통 때에도 늘 영양이 좋도록 해 줘야 합니다. 종기가 생겼다면 더욱 영양에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종기가 처음 생겨 나쁜 피가 엉길 때는 거머리로 빨아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종기 부위가 이미 곪아 터진 뒤에는 쓸 수가 없지요. 거머리가 피를 빨아내는 곳은 피부 표면에 가까운 곳입니다. 피부 깊숙한 곳에 있는 고름이나 피는 거머리가 빨아낼 수 없지요. 이번에 그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거머리가 빨아냈지만 전하의 종기가 아직 낫지 않는 걸 보면 말입니다.”
중종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의원 제조의 말이 옳다. 그 동안 종기가 낫지 않아 약도 먹어 보았지만 효험이 없고, 진물과 함께 고름이 섞여 나오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거머리로 시험해 보았더니, 퉁퉁 부어올랐던 곳이 많이 가라앉아 편편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름이 많이 나오고 환부가 낫지 않는 것을 보니 거머리는 피부 깊은 곳의 고름은 빨아내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거머리 사용을 그만두고 고약을 붙였다. 처음보다는 많이 괜찮아졌지만 종기 부위가 완전히 낫지 않고 고름이 그치지 않으니, 앞으로는 내의원 제조가 지난번에 권한 대로 삼나무 진액을 쓰고 십선약을 먹어야겠어.”

종기로 고생한 왕 여럿 있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삼나무 진액을 종기 부위에 바르면 신통한 효과가 있습니다. 곯아 터진 곳도 쉽게 아물게 해 주지요.”
거머리는 논에서 살며 사람 피를 빨아먹는다. 그래서 거머리를 이용하여 피고름을 빨아내게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중종 말고도 종기로 고생한 왕이 여러 명 있었다. 세종은 등에 난 종기로 돌아눕지도 못해 온천 목욕으로 효험을 보았다.
세종의 아들 문종은 악성 종기에 시달렸는데,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효종과 정조도 종기를 앓다가 목숨을 잃은 비운의 왕들이다.
조선의 왕들에게는 종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거머리까지 잡아와 종기 치료에 썼겠는가. 왕도 몸이 아프니 체면 차리지 않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매달렸음을 알 수 있다.  〈신현배/아동문학가, 시인〉

♠“왕이 광대를 보고 크게 웃어, 입술의 종기가 터져 치유되었다면서요?”

광대가 왕을 웃겨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입술의 종기가 터져 치유되었다는 이야기는 문화 인류학의 고전인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온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철을 왕의 몸에 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1800년 조선의 정조 대왕이 등에 생긴 종양으로 죽었다. 곪은 데를 째는 침을 썼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 어떤 왕이 입술의 종기로 고생할 때, 그의 시의가 광대를 불러들였다. 광대는 농담을 걸어 왕을 크게 웃겼는데, 그때 입술의 종기가 터져 나았다고 한다.’
왕이 광대 때문에 입술의 종기가 나았고, 또 그 왕이 누구인지 확인된 것은 없다. 그리고 프레이저는 정조가 침을 쓰지 않아 죽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조는 1793년 여름 머리에 종기가 나서 얼굴과 턱으로 퍼지자,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 보았다. 그래도 낫지를 않자 피재길이라는 의원이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섞어 만든 고약을 붙여 정조의 종기를 치료했다.
그러나 1800년 여름 정조는 종기가 재발하여, 등의 종기가 터져 서너 되의 피고름을 쏟을 만큼 고생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피재길의 웅담 고약도 듣지 않고,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 정조는 6월 28일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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