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를 지내고- 이동희 / 소설가
"제사 지내는 것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
우리 유교문화는 생활 속 실천 도덕"
벼를 다 베고 나면 집집마다 감을 딴다. 호두를 털고 난 후의 일정이다. 이 근동에는 집집마다 감나무, 호두나무가 한 그루씩은 다 있다. 감을 따는 인력은 다른 품삯보다 두 배 세 배를 더 준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하는 것이어서 위험하기도 하지만 잘 따지 않으면 허실이 많고 우선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장대로 따기 전에 손으로 딸 수 있는 것을 다 따는 것이 빠르다. 하루 30만원씩 하는 포크레인을 들이대고 따기도 한다. 시골 농가에서도 결국 능률이라는 시간과 돈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자기네 나무에 딸린 감을 따서 먹는 경우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대개 밭에다 감나무를 많이 다른 곡식 대신 심어 따고 놉을 사서 깎아 곶감을 한다. 지붕에는 곶감 타래를 만들어 놓아 다시 하나의 농사가 시작된다. 곶감 타래 시설은 역시 돈이 꽤 들고 기계적으로 스위치를 누르면 드르륵 달아 올리는 승강기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한 접(100개) 두 접 하는 단위보다 한 동(100접) 두 동 하는 단위를 많이 듣게 된다. 남의 감을 사서 곶감으로 깎아다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 수입이 괜찮게 되기 때문이다.
빈 들판에는 트랙터로 벼를 베고 난 자리에 그루터기들만이 황금색 벼를 생산한 농토였음을 말해 주고 여기 저기 허연 비닐 둥치들이 널려 있다. 농촌의 신풍경이다. 멀리서 보면 한 아름쯤 되는 것 같지만 가서 보면 두 아름도 넘는다. 혼자서는 들지도 못하는 짚동이다. 벼를 털고 난 짚을 싸서 묶어둔 것으로 역시 기계(트랙터)로 작업을 한 것이다. 알곡만은 못하지만 볏짚도 돈이 된다. 예전에는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기 때문에 농가의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지금도 소먹이 등 사료로도 쓰고 짚공예 등 여러 용도가 있다.
마을 앞 길 가에는 벼를 긴 그물자리에 말리고 경운기로 방앗간으로 실어다 놓아 허름한 방앗간이 터져 나간다. 아무 표시를 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것임을 잘 알아 순서대로 도정을 해 준다. 정미소는 햅쌀의 생산지였다.
금방 찧은 쌀은 밥맛이 좋고 영양가도 더 있다. 농촌에 어정거리는 노인들은 자식 손자들에게 그런 도움을 주는 보람을 느끼고 산다. 주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농촌 농민들은 쌀이 되었든 고구마가 되었든 무 배추 시래기가 되었든 자꾸 주려 한다. 자식에게도 주고 손자에게도 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자꾸 싸 준다. 그것이 농민의 마음이고 한국인의 마음이다. 사랑이다. 흙에서 땀 흘려 가꾼 농산물은 공산품을 생산하는 경우와 다르다. 가령 과자공장 빵공장을 한다고 했을 때 같이 먹는 것이지만 그렇게 나눠줄 수 있을 것인지, 대답은 아닌 것 같다.
콩 타작을 하고 깨를 털고 김장을 하고 그리고 이것저것 꾸려 자녀들에게 택배로 보낸다. 한 박스에 4, 5천원이면 이튿날 서울 부산 어디고 다 집까지 배달해 준다.
늦가을이라고 할까 초겨울 풍경들이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또 하나의 행사가 기다린다. 시사(時祀)이다. 시제 시향 묘사라고도 하는데 음력 시월에 먼 조상의 무덤 앞에 지내는 제사다. 그의 집안의 경우 음력 10월 10일부터 4일간 지내던 것을 줄여서 2일간만 지낸다. 집에서 지내는 제사는 4대조까지이고 5대조부터는 묘 앞에서 산제를 지낸다. 그래서 묘사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까지가 4대조이고 5대조부터는 이름이 없다. ‘6대조, 7대조, 10대조……’ 하고 숫자를 붙여서 부른다.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고 실천 도덕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는 달리 죽은 사람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하지 않고 뻣뻣이 서서 기도를 하거나 아예 참여를 하지 않는다. 부모 조부모 묘에 성묘를 하는 것과는 달리 제사를 지내고 더구나 먼 조상에게 시사를 지내는 것을 죄악시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되는 건가?”
그리고 우상이 되는 것인가. 그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귀신이 되잖아요.”
“그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왜 신이라고 쓰는 거지요?”
“누가 써?”
“제사 지낼 때마다 써 붙이잖아요.”
영호는 분명한 사실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금년 처음 참례하였지만 계속 절을 하지 않고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누구누구의 신위(神位)라고 지방을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 세차……. 시사를 지낼 때 읽는 축(祝)에도 수 없이 신이 등장한다. 가는 곳마다 산신축을 읽으며 토지신에게 먼저 고하고 제를 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날도 여러 차 따라다니며 보조를 한 영호다.
“너는 왜 절을 안 하느냐?”
그런 것을 탓하지도 않는다.
“여기 온 것만 해도 된 거여.”
교수인 장조카도 아이들은 데리고 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 의사가 되어 있었다. 또 중형 조카는 농림부의 서기관이지만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묘사에는 오지 않는다.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왜 우리가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를 신이라고 부르는가. 그러니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다른 신을 우상으로 돌리고 절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좌우간 절은 절이고 오래 전에 세상을 뜬 먼 조상들과의 핏줄을 어떡하란 말인가. 나와는 상관없어도 되는 것이며 난 몰라라 해도 되는 것인가.
갈수록 시사에 참례하는 숫자가 줄어들고 또 죽어서 못 오기도 하였다. 음복을 하며 한 족형이 안을 내놓았다. 여러 묘에서 흙을 한 삽씩 떠다가 가까운 곳에 하나의 묘를 쓰고 비를 세우고 한 곳에서만 성묘를 하고 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또 한 족숙은 토요일에 하여야 많이 참례할 수 있으니 음력으로 11월 둘째 토요일에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산상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변경된 것은 없었다. 길에까지 내려와 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간소안에 대한 합의는 얻지 못하였다. 일단 이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리 유교문화는 언제까지 갈 것인가. 특히 그의 마을 종중의 시사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여러 가지 장례문화가 있다. 수목장이니 납골당이니 많이 간소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계속 이어질 것인가.
정월 대보름부터 시작해서 농번기를 맞고 벌초를 하고 추석에서 설로 이어진다. 그것이 시골 1년 행사 일정이다.
|
묘사를 차리는 산지기는 없고 떡과 적, 건어물 등을 장만해주는 신종 업체가 생겨 시간을 맞추어 준다. 제일 먼저 산제를 지내는 장자올 골마 군자감정 묘 앞에 꿇어 앉아 잔을 올리고 있다. 마지막 차례인 흥덕리 설보름이 피밭자리 날망의 8대조 묘까지 지내고 찬술로 음복을 한 후 덜덜 떨며 제물을 나누어 담은 봉지를 하나씩 들고 돌아간다.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