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1 월간 제726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된 역관

1696년(숙종 22년)에 일어난 일이다.
외국과의 통역을 맡았던 역관 변승업은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관을 마련했다. 당시로서는 최고급품으로 치는 관이었다. 또한 그는 ‘명품’ 관으로도 모자라 관에 옻칠까지 했다고 한다.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에는 일반 백성은 관에 옻을 칠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때였다.

부인의 관에 옻칠한 역관

일개 역관이 부인 장례를 위해 관에 옻을 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대신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관에 옻칠을 하는 것은 왕가에만 허락된 일입니다. 상감마마나 왕비마마의 장례를 치르는 국상 때만 할 수 있는데, 역관 신분에 감히 관에 옻칠을 해요?”
“변 역관을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나라의 법을 어긴 죄로, 당장 잡아들여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변승업을 비난하며 그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되자 변승업은 사태를 해결하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대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고 그들에게 10만금을 뿌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변승업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은 잠잠해지고 그는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정재륜이 쓴 ‘공사견문록’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변승업이 어느 정도 부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그는 평생 100만 냥이 넘는 재물을 벌어들였고, 자손들에게 남긴 유산만 해도 50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는 주인공 허생이 부인의 다그침에 못 이겨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하려고 장안 제일의 갑부인 변씨 성을 가진 부자에게 만 냥을 빌리는 장면이 나온다. 초면에 다짜고짜 만냥을 빌려 달라는 허생에게 변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덜컥 돈을 빌려 준다. 이 소설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변승업이라는 것이다.
역관들 가운데는 변승업 말고도 여러 명의 부자가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중개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중개무역 통해 부 축적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 일본 등 외국에 나가서 통역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라에서는 중국에 나갈 때 역관에게 인삼, 쌀, 면포 등을 여행 경비로 주었다. 역관 한 사람에게 주어진 인삼이 80근으로, 은 2천 냥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역관은 중국에 가서 물품들을 팔고 비단, 약재 등 중국 제품을 샀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에 있는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팔아넘겼다.
당시에는 청나라에서 일본 상선의 입항을 받아들이지 않아, 중국과 일본의 직접적인 무역이 없었다. 그래서 역관은 중국 제품을 청나라에서 사들여 일본에 넘기는 중개 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변승업이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중개 무역 덕분이었다.
조선 시대에 역관들은 외국어 통역, 외교 문서 번역, 무역 업무뿐 아니라 간첩 활동까지 했다고 한다.

간첩 활동까지 해

‘조선왕조실록’ 1780년(정조 4년) 11월 27일자에는 정조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역관 정원시를 불러 청나라의 사정을 자세히 캐묻는 대목이 나온다. 청나라의 방어 태세는 어떠하냐, 시장과 수로의 수송 제도는 어떠하냐 묻고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몽골 족은 코가 크다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예, 전하. 눈은 쑥 들어갔고 눈썹이 큽니다. 코는 들창코에 얼굴은 나귀 형상이어서, 짐승이나 도깨비를 보는 듯합니다. 몸에서는 누린내를 풍겨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찌나 난폭한지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역관들은 외국을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새로운 문물에 일찍 눈을 떴다. 그래서 망원경, 지구의, 시계 등 뿐 아니라 고추, 고구마, 감자 등을 조선에 처음 전했다고 한다.
 〈신현배/아동문학가, 시인〉

♠ “사역원 안에서 중국말을 쓰지 않고 우리말을 쓰면 매를 맞았다면서요?”

조선 시대에는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일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역원이 있었다. 여기에는 중국어를 배우는 한학청, 몽골어를 배우는 몽학청, 여진어를 배우는 청학청, 일본어를 배우는 왜학청과 온종일 외국어로만 말해야 하는 우어청이 있었다.
사역원에 입학하면 먹고 자며 외국어를 공부했는데, 역관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에서 3년에 한 번 시행하는 과거 시험인 잡과의 역과에 응시하여 합격해야 했다.
사역원은 학생들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켰다. 3년을 공부해도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면 사역원에서 쫓아내 군대에 입대시켰다. 또한 세종 때부터는 사역원 안에서는 우리말을 금하고 오로지 외국어만 쓰도록 했다. 만약에 우리말을 쓰다가 발각되면 학생들은 매를 맞고, 관리들은 관직에서 쫓겨나 일 년 동안 근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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