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의 오색빛 풍류
12월이다.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살며, 2010년을 되돌아본다. 올 한 해 가장 유쾌했던 일은 무엇인가? 한 획을 그을 만큼 의미 있는 일은 또 무엇이었나? 이렇게 2010년을 짚으며, 새해를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12월에 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과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을 맞이하는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평가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읽기로 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학창시절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통해서 처음 ‘금오신화’를 읽었다. 하지만 온전하게 ‘금오신화’를 읽은 것은 2006년. 한문본이 아니라 한글 번역본으로 정말 재미있게 읽었었다. 오늘, 다시 책을 펼쳐 읽으니, 절절한 감정이 담긴 시구(詩句)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금오신화’를 지은 김시습은 14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3살 때 한시를 짓고 5살에는 ‘중용’, ‘대학’ 등에도 능통해서 신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재를 보였던 김시습은 성인이 되어 큰일을 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21살이 되던 해, 읽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기구한 방랑의 생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31살 때인 1465년 경주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여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5편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외에도 더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는 죽은 여인의 귀신이나 전설 속 선녀와의 사랑이야기이고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은 염라국과 용궁에 다녀온 선비가 그곳에서 듣고 본 것을 옮긴 이야기이다.
‘금오신화’의 첫 이야기인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한 이야기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늦도록 장가를 못간 양생이 만복사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달밤에 배나무 아래를 거닐며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 등불로 점 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다음날 만복사에 간 양생은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한다. 그는 저포놀이에서 지면 법연을 차릴 테니, 만약 부처님이 지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저포놀이에서 이긴 양생은 아리따운 배필을 만나 운우의 정을 나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이승의 사람이 아니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정조를 지키다 숨진 귀신이었다. 양생은 여인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 양생은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준 뒤에 제문을 지어 위로한다. 그 뒤 양생은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지 못하게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생규장전’으로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본 이야기이다. 개성에 사는 이생이 최씨 처녀를 사랑하여 부부가 되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아내를 잃는다. 아내를 잊지 못하던 이생은 귀신으로 돌아온 아내를 만나 끝없는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야기인 ‘취유부벽정기’는 부벽정에서 취하여 논 이야기다. 홍생이 부벽정에서 선녀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았다. 놀라서 꿈을 깬 홍생은 자신이 죽을 것을 느끼고 주변을 정리한다. 그의 시체를 빈소에 모셨는데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자,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네 번째는 ‘남염부주지’로 남쪽 저승을 구경한 이야기다. 박생이라는 사람이 남염부주라는 곳에서 염라대왕을 만나 귀신이란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정치에 대한 토론도 벌인다. 그리고 결국 염라대왕의 후계자로 지목된다.
다섯 번째는 ‘용궁부연록’으로 고려시대 문인인 한생이 용궁에 다녀온 이야기이다. 한생을 용궁으로 초대한 용왕은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글을 부탁한다. 한생의 글에 감탄한 용왕과 조강신, 낙하신, 벽란신은 한생과 시를 주고받으며 즐기고, 한생은 용궁구경을 마친 후에 되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참 오랜만에 고전문학과 만났다. ‘금오신화’를 읽는 동안 풍류와 낭만을 제대로 느낄 줄 알았던 우리 선조들을 대면한 것 같아 즐거웠다.
찬바람에 코끝이 시린 12월이다. 뒤숭숭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오늘, 풍류를 만끽하고 싶다면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펼쳐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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