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1 월간 제723호>
매화골 통신 ⑦ 풀을 깎으며 길을 찾는다

- 벌초의 계절에 -    이동희 / 소설가

"추석 한달쯤 전부터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을 깎기 위해서다"

추석이 가까웠다.
우리나라 최대 명절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러 가는 행렬로 주말 새벽부터 고속도로가 꽉 메인다. 큰 명절이 둘이 있다. 설과 추석이다.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고 세배를 하고 덕담을 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초하루, 새해 새 아침의 의미는 많이 있다. 음력이 더 과학적이라는 말을 한다. 농경사회가 아닌 지금도 설부터 시작하는 스케줄을 우리는 지키고 있다.
추석도 음력으로 팔월 보름이다. 그래서 팔월 추석이라고 한다. 설은 아침의 의미를 새기지만 추석은 글자대로 저녁의 의미를 새긴다. 한가위라고 하는 우리 고유의 말 이름도 있지만 맑은 가을 하늘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저녁에 소원을 비는 한국 여인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디 여자의 마음뿐이겠는가.
다른 얘기지만 승용차가 제일 많이 팔리는 시기가 추석 때라고 한다. 중고차 매매를 포함해서이다. 그만큼 자가용을 타고 고향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인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설에도 고향에 가고 부모와 어른을 찾아뵙지만 추석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조상을 찾아뵙고 성묘를 하는 것이다. 귀성 행렬은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든다. 민족의 대 이동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기차, 고속버스는 그 때 자리를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승용차는 길이 꽉 막힌다.
성묘나 귀성길만 막히는 것이 아니고 그 한 달 쯤 전부터 또 한 차례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추석을 앞두고 조상의 묘에 1년 동안 자란 풀을 깎기 위해서이다. 벌초 행렬이다. 품삯을 주어 할 수도 있지만 자식이나 후손된 도리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초와 성묘를 겸하고 있다. 벌초를 하고 나서 성묘를 하고 오는 것이다. 벌초를 하고 묘 앞에 절을 한다. 풀을 깎는 것은 이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단장을 한 후에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벌초는 벌초이고 성묘는 성묘이다.
추석에 성묘를 하는 것은 단순히 조상을 찾아뵙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해 농사를 지어 그 수확물로 송편을 빚고 과일을 깎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고 묘 앞에 가서 다시 인사를 하는 것이다. 추수감사절 수확제와도 그 자세가 다르다. 제사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이 있고 형편이 있고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의 집안의 경우 서울 있는 조카들 사정에 맞추어 대개 추석 2주일 전 쯤 전의 주말을 택하여 놉을 얻고 몇 군데로 나누어 벌초를 한다. 일요일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어 피하고 5일제근무 이후 토요일로 날을 잡는다. 8월을 넘어서야 선선하기도 하고 날씨를 알 수 없으니 한 주일 쯤 여유를 두었다. 비가 오는 경우 한 주일 연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도 비가 다시 오면 우비를 입고라고 벌초를 해야 한다. 그럴 때는 옷이 다 젖어야 한다. 비를 맞으면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길도 없는 묘를 이리 저리 찾아다니며 수중 작업을 하다보면 옷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미(묘)만 남겨 놓고 다들 오지도 않으니 어째야 되는 기라요?”
조카인 재후는 이 때만 되면 울상이다. 포도 출하 작업이 막 끝나는 시기이긴 했다.
온 산이 묘로 덮여 있고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없는 것이다. 물론 미역뱅이 선산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말하여 묘의 주인도 다 모른다. 같이 따라다니며 벌초를 하다가 하나 하나 마을을 떠나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것이다.
“딴 소리 말고 하던 대로 해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오는 사람은 오고 돈으로 붙이기도 하고 아무 연락이 없이 못 오기도 한다. 안 온다고 그 집 묘를 그냥 묵힐 수는 없고 누구 묘가 됐든 있는 대로 다 벌초를 한다. 무슨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외상 값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 오고 못 오는 형편이 오죽 하랴. 그러나 그러면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묘를 잃어버린다. 매년 묘를 찾아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지 않으면 그 위치라든지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몇 년 만에 한 번씩 가가지고는 숲 속 산길 풀에 묻힌 묘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매년 벌초를 하는 것은 조상의 묘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구실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풀은 무성히 자란다. 그것을 매년 깎지 않으면 묵고 쑥대밭이 되는 것이다.
이번 벌초 날은 9월 11일 토요일로 잡았다. 그 다음 토요일 18일은 추석 4일 전으로 촉박하기도 하고 또 비가 올 경우 연기하기 위해 비워둔 날짜이다. 그는 그날 볼 일이 있어 18일로 하자고 했지만 조카들은 자기들이 할 테니 볼 일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면목이 없이 되었다.
오리실 이상호(68세)씨는 경우가 좀 다르다. 묘들이 밭 옆에 있기 때문에 항상 조상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담배를 재배하던 4000㎡ 정도 되는 복숭아밭 옆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묘가 있어 늘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오리실에서는 내려다 보이는 곳이고 느랏 유전리에서 사리안 직지사로 넘어가는 능말기 고개 마루에 밭과 묘가 있다. 아버지가 살던 화산리에서 보면 뒷산이다. 팔밭(파전, 화전)으로 일군 땅에 주먹만한 천중도가 주렁주렁 달렸다. 97세의 어머니도 세상을 뜨면 이 밭에 묘를 쓸 것이다.
“여기가 어떨까 하는데….”
그에게 복숭아 밭 가의 한 곳을 가리키며 묻는다. 큰 어머니와 합장을 한 아버지 묘와 거리를 둔 밭 가운데였다. 아무에게나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이는 아래지만 한 항렬 위의 아저씨다.
“좋구만.”
그가 어정쩡하게 말하고 황악산 이쪽 천덕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좌향을 볼 줄 알아서가 아니라 6·25 전쟁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파란 많은 어머니에 대한 늙수그레한 아들의 효성이 느껴졌다.
묘자리를 잡아놓고 수의를 장만해 놓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을 믿고 싶었다.

밭이랑의 풀은 쉴 새 없이 뽑고 베지만 밭둑에 있는 할아버지 묘의 풀은 한 길이 자라도록 그냥 두었다. 1년에 한 번 8월 초 하루(음력)에 모두들 모여서 벌초를 하는 날 외에 낫을 들이댈 틈이 없다. 현물 농사에 손이 먼저 가기 때문이다. 이 무렵 여기 저기 골짜기마다 벌초를 하는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할아버지 묘의 수복한 풀을 깍으며 이상호 씨는 부끄러운 낫빛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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