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민 정 회원〈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
새벽닭이 목청을 가다듬고 하루를 알리기도 전인 이른 시간, 인기척이 느껴져 잠에서 깬 나는 머리맡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이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인기척은 옆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밭에 나갈 채비를 하시는 소리였다. 손자, 손녀가 놀러왔을 때는 좀 쉬셔도 좋으련만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셨다. 다른 가족들은 꿈속을 헤매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할머니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서두르셨다. 찬바람이 겨울을 알리기 전부터 감귤을 따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언제부터인가 예전에 비해 턱없이 일손이 부족해 1분이라도 일찍 밭에 나가셔서 모자란 일손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께서 밭으로 가신 후 나는 다시 잠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도와드릴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아침잠이 덜 깬 상태라 조금 졸리긴 했지만 집 밖을 나서니 간밤에 맺힌 이슬이 햇빛아래 반짝거리고 있었고 쌀쌀하긴 했지만 상쾌한 시골의 아침공기 덕에 기분이 좋았다.
밭을 향해 가면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각자 자신의 밭을 돌보고 계시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마을은 비록 그 규모가 작긴 하지만 마을사람들 모두가 이 시기엔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많은 경작지들을 지나쳐 주황빛으로 물든 감귤밭에 도착했다. 벌써 할머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도착하시자마자 할머니를 도와 귤을 따셨다. 어릴적부터 매년 이맘때쯤이면 온 가족이 모여 함께 귤을 따곤 했는데, 할머니와 부모님에 비하면 서툰 솜씨였지만 가위를 들고 열심히 작업을 하다가 조금씩 채워지는 바구니를 볼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힘들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귤을 까서 먹기도 했다. 요즘은 감귤 따기 체험농장이 생겨 체험객들이 직접 따서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밭에서 일을 하다가 목이 마를 때 엄마 몰래 먹는 감귤의 맛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나무를 옮겨 다니며 귤을 따다보면 어느새 점심때가 되어 가족들 모두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반찬이 맨 밥에 김치뿐이라 하더라도 진수성찬처럼 맛있게 먹으며 일을 하느라 아껴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게 마냥 좋은 점심시간도 잠시,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 어린 나도 허리가 아팠는데 할머니께서는 아프단 소리 한번 안하시고 귤을 따는 일에만 열중하셨다.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해는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붉은 발자국만을 남겨놓고 모습을 감춰버렸다. 일을 한건 고작 하루였지만 몸은 마치 1년을 일한사람처럼 녹초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편찮으시다거나 불평 한번 안하시고 이런 생활을 50년 이상 해오셨다고 생각하니 지금 나의 피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비록 자주는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밭을 방문해 도움을 드렸던 일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몇 번밖에는 도와드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할 당시에는 힘이 들어도 모두 모여 일을 했기 때문에 가족의 정도 느낄 수 있었고, 귤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들이 우리들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귤과 더불어 가을에는 고구마, 겨울에는 당근을 재배하시는 할머니 덕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흙을 가까이 하며 자랐다. 좋은 흙을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나는 흙도 우리와 같이 숨을 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꽤 있었는데,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하나, 둘씩 도시로 떠나버렸고 지금 할머니가 계신 마을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신기한 일이 되어버렸다. 도시에는 정원수를 초과한 학교가 넘쳐나지만 시골의 학교는 여러 마을의 학생수를 합쳐봤자 채 100명이 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서는 학교시설을 최신식으로 바꾸거나 스쿨버스까지 운영한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효과를 본 학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들은 하나, 둘씩 폐교를 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그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
아침이슬, 좋은 흙의 냄새 보다 TV와 컴퓨터를 즐기는 요즘 세대들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직접 농촌체험을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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