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1 월간 제720호>
<4-H인의 필독서> 허삼관 매혈기

자식을 위해 목숨 걸고 피를 파는 아버지

즐겨 사용하는 속담 중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 속으로 중얼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팍팍하지만 살아있으니 다행이지.” 그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듯하다. 허나 그것만으로 힘을 내기 어려울 때는 중국의 현대작가인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읽는다.
‘허삼관 매혈기’는 제목 그대로다.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피를 파는 이야기다. 제목만으로 이 소설이 끔찍할 것 같다는 상상은 접으시라. ‘허삼관 매혈기’에는 진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 비참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작가 특유의 위트와 재치로 풀어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는 끝내 진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아무리 책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면 하루 이틀 새에 끝까지 읽을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허삼관이 할아버지를 뵈러 넷째 삼촌댁에 왔다가 신랑감이 피를 팔지 않아서 파혼한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 결혼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고, 건강한 사람만 피를 파는데 피를 팔지 않았으니 건강하지 않아 파혼했다는 거다. 허삼관은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건강의 징표도 되어주는 피를 팔기 위해 근룡이와 방씨를 따라 나선다. 피를 팔고 나서 보혈과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데운 황주 두 냥을 마시며 방씨는 허삼관에게 피 팔아 번 돈을 어떻게 쓸지 묻는다. 허삼관은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거라는 건지를 알았다면서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큰일에 쓰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귀한 돈으로 뛰어난 미모를 지닌 허옥란과 결혼을 한다. 허옥란은 하소용과 사귀고 있었지만 피를 판 돈의 위력으로 인해 하소용이 물러난 것이다.
허옥란과 결혼한 허삼관은 일락, 이락, 삼락, 세 아들을 두게 되는데, 첫째 일락이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일락이의 얼굴이 하소용을 점점 닮아갔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남의 자식을 기르는 허삼관을 두고 중국 남자에게는 최악의 욕에 해당되는 ‘자라 대가리’라며 수군거린다. 지난 9년 동안 일락이를 키우며 누구보다 사랑했던 허삼관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일락이를 제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가족들이 옥수수죽만 마신지 57일째 되는 날, 피를 판 허삼관은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를 제외한 가족들을 데리고 국수를 먹으러 승리반점으로 간다. 국수가 먹고 싶어서 가출을 한 일락이는 하소용을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서럽게 울며 길을 떠돌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일락이를 발견한 허삼관은 아이를 업고 걸으며 쉴 새 없이 일락이에게 욕을 퍼붓는다.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중략)”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지금 우리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허삼관이 일락이를 제 자식으로 다시 받아들여 품어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스물한 살이 된 일락이가 간염에 걸리자 허삼관은 생명을 담보로 한 매혈을 계속해 돈을 모은다. 여관에서 동숙했던 노인이 “먼저는 힘을 싹 팔았고, 그 다음에는 온기를 싹 팔았다더니, 그럼 이제는 목숨만 겨우 남았을 텐데, 또 피를 팔면 그건 목숨을 팔아넘기는 거 아니요?”라며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지만 허삼관은 피를 파는 것으로 아들의 목숨을 구해낸다.
예순이 된 허삼관이 승리반점 앞을 지나다가 돼지간볶음 냄새를 맡고 불현듯 그것이 먹고 싶어져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하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한다. 생애 처음으로 피를 못 팔게 된 허삼관은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제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린다.
이런 허삼관의 모습에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삶이 겹쳐져서 마음이 아렸다. 한때, 지친 내 어깨를 다독여줬던 이 책을, 오늘은 아버지를 위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평생 희생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정진아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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