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1 월간 제719호>
매화골 통신 ③ 죽을 시간도 없이 바빠요

- 포도밭에서 -    이동희 / 소설가

"늘 해가 모자란다. 밭은 경운기로 간다.
언제부턴가 밭을 갈거나 땅을 고르는 것을 로터리를 한다고 한다."

웃뜸 중간뜸 아랫뜸을 상리 중리 하리, 2킬로 정도 떨어진 안골을 내동이라고 하고 다 합쳐서 노천리이다. 늙을 노(老)자 내 천(川)자 노천인데 옛 이름은 ‘노래’이다. 늙은 내라는 뜻의 ‘노내’는 아닌 것 같고 노래한다는 ‘노래’도 물론 아니고 토속적인 마을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이 마을이 생긴 때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노래라고 할 때는 안골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한동안 의용소방대장을 지낸 이재후를 인계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모두들 소방대장이라고 부른다. 별명이라고 할까 경칭이다. 거실에는 근엄하게 제복을 입은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고 젊음과 힘의 상징인 그런 호칭이 별로 듣기 싫지 않은지 왜 그렇게 부르느냐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장짜리 직함에 대한 매력이라기보다 그 사명감 같은 것에 대한 애착이다. 소방대장은 한밤중에도 무슨 소리가 나면 몽유병자처럼 벌떡 일어나 뛰쳐 나오는 소방이든 수방이든 여전한 전천후 인력이다.
얼마 전에는 대동회장을 하기도 했는데 대동회장의 임무 가운데 제일 중한 일이 동제의 제주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정(淨)하게 하여야 한다. 싸움질을 하고 체신이 없어서도 안 되고 너무 이악하고 술타령을 하며 길바닥을 쓸고 다녀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물론 추대되지도 않는다. 그 외에도 지킬 것이 많은데 앞에서도 조금 얘기했었다. 대동회장의 업적 중에는 효자문을 중수하였는데 물론 군에서 2000만원을 지원 받은 것이다. 작은 규모인대도 단청을 하고 현판을 다시 해 달았다. 무슨 일을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책임을 지고 여축 없이 해낸다. 그래서 아이들 학교 기성회장도 하고 종중의 총무 일도 맡아서 했다. 족보 만드는 일, 묘사 지내는 일, 벌초하는 일을 다 떠 맡아서 한다. 다른 사람은 할 사람도 없었다.
“묘만 기고 다 떠나고 없어여.”
“수고가 많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누군 깎고 누군 묵힐 수도 없고, 도무지 어째야 되는 기라요?”
“하는 데까지 해야지 무슨 소리라?”
“참 내!”
묘를 묵힐 수는 없는 일이지만 조상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옛 소방대원들 놉을 얻어서라도 벌초를 하고 있어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묘사 지내는 것은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지만 결국 그가 다 맡아서 하게 되었다. 묘사답도 벌초답도 다 버리고 묵었다. 칭찬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일제시대부터인지도 모른다-정말 마지메였다. 진국이었다.
미장이 일을 맡아서 하면서 일꾼들을 몰고 다녔지만 아는 사람 차에 허리를 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하고부터는 센 일을 않고 농사에만 매달렸다. 전에도 농사를 안 지은 것도 아니고 농삿일이 그렇게 수월하고 힘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농사는 쉬엄쉬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벼 농사를 안 지은 지는 한 참 되었고 포도 농사만 짓는데 대략 잡아도 4배 정도 수익이 더 된다고 할 수 있다. 할머니 떡도 싸야 사 먹는다고, 끙끙거리고 땀 흘리고 애써서 한 푼이라도 이득이 되는 쪽을 취하기 마련이다. 농의 정신이 어떻고 농자천하지대본이 어떻고 하는 문자는 사라진지 오래고 마을과 농토를 건너다니는 다리 난간에는 새마을 깃발이 도열하여 꽂혀 있다. 그렇다고 깃발만 펄럭이지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는 것도 없었다.
좌우간 마을 농가 대부분이 포도 농사를 짓는다. 해동을 하고부터 한 5개월 동안 밭에 나가 산다. 묵은 껍질도 벗기고 지주에 이탈하지 않도록 철사와 끈으로 넝쿨을 달아매기도 하고 밭을 갈고… 늘 해가 모자란다. 밭은 경운기로 간다. 언제부턴가 밭을 갈거나 땅을 고르는 것을 로터리를 한다고 한다. 소가 하던 갈기 흙부수기 땅고르기 등의 작업이다.
소방대장은 남의 땅까지 합하여 4290㎡ 정도 포도 재배를 한다. 내외가 매일 아침에 나가 해질 때까지 고개가 떨어지도록 씨름을 해야 한다. 로터리 작업을 하고 나면 퇴비를 하고 부식포 비닐을 깔아 풀이 안 나도록 덮고 농약을 치고, 농약도 경운기로 동력을 이용하여 친다. 8월 20일 경 수확하게 되는데 2000 내지 2400박스 정도 목표로 한다. 상차비 하차비 서울 등 구판장의 경매 구전 등을 제하면 1박스에 계산하기 좋게 1만원 정도 되고 2000박스면 2000만원이다. 거기서 농약 비료 퇴비 인건비 그리고 박스 봉지 값을 빼야 한다. 그것이 한 해 농사의 타작-결산-이다.
그 외 포도주를 담아 패트 병으로 100병 정도, 포도즙을 파우저에 담아 100상자 정도 만들면 몸으로 기름을 짠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아카시아꽃 밤꽃 꿀을 수확하는 벌농사는 칠 손이 자라가지 않는다.
얼마 전 3월 중순에는 면민 등산대회를 하였는데 거기도 빠졌다. 작년에는 관내 평전리로 해서 개춘산을 올랐었고 이번에는 버스 10대로 백두대간 소백산을 갔다 왔다. 모두들 소방대장이 빠지면 어떡하느냐고 끌었지만 꾹 참고 들로 나갔다. 자라는 병아리에게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디냐고 하지만 묵은 뿌리를 캐내고 반은 새로 심은 포도나무가 금년도 수확을 얼마나 쏟아 내놓을지 불안하였다. 결코 하루라도 어영부영할 수가 없었다. 소백산이고 태백산이고가 문제가 아니고 백두산이래도 그런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아니 좀 쉬었다 하지 뭘 그렇게 죽기 살기로 그래?”
“죽을 시간도 없어여.”
“여러 소리 말고 막걸리나 한 잔 해야.”
“저녁에 집으로 와요. 포도주가 맛이 들었어요. 한 병 드릴께.”
“내가 한 잔 살라고 그랴.”
“술 먹을 새가 어디 있어. 눈코 뜰 새도 없구만은.”
그는 방해만 하는 것 같아서 바쁜 농부에게 말을 시키는 대신 들판을 걸었다. 퇴비 냄새와 함께 흙내가 코를 찔렀다. 흙내는 박테리아가 썩는 냄새라는 말이 생각난다. 흙이 고마운 것은 아니 위대한 것이라고 했던가, 좌우간 거름으로 꽃을 피우고 달콤한 열매를 열게 하는 것이다.
썩어라. 푹푹 썩어라. 이제 곧 꽃이 피고 탐스런 포도 송이가 주체 못하게 매달릴 것이다.

마을 농가 대부분이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노천리뿐이 아니고 다른 영동군내 농가들도 사정이 같다. 벼 농사의 4배 수익이 된다고 한다. 영동역에서는 와인트레인을 운영하기도 한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찬 포도주를 마셔 보았을 것이다. 레드? 화이트? 그런 낭만과는 달리 포도 농사는 참으로 힘겹다. 지주의 포도 나무 껍질 벗기기 작업을 하는 이재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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