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1 월간 제716호>
<제3회 과제발표대회 백일장 최우수상 작품> 이황 선생님과 함께 걸은 황토길

이선미 회원 〈충북 청원고등학교4-H회〉

<4-H회원들이 도산서원을 탐방하고 '우리 얼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백일장을 가졌다.>
천 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인 이황의 숨결이 담긴 도산서원! 이곳은 지난 5월 학교에서 국토순례 대행진으로 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땐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도산서원에 있는 진풍경을 제대로 관람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는데, 오늘 이런 좋은 기회를 얻어 그곳의 풍경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이황 선생님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제일 먼저 이황 선생님의 학식에 대해 물어봤다. “이황 선생님, 선생님의 학풍은 무엇인가요?” 이황 선생님께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나는 성리학 중에서도 이기이원론이라는 것을 주장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기이원론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을 꾹 눌러 참고 나무사이로 빛나는 햇빛을 따라 광명실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나는 이곳이 도서관(실)이라고 해서 책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박혀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실망했다. 책이 있기는 커녕 먼지만 잔뜩 묻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왜 이럴까 한참 고민하다가 학교 근현대시간에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아, 이황의 책은 일본의 학자들이 이황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가져갔지!’ 나는 이황 선생님이 자랑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이황의 학문을 보고 이황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이런 이황 선생님이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황 선생님께선 내개 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냐며 이젠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때 태어나 선조가 왕에 즉위할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특히 이황은 선조가 가장 아끼고 총애하던 신하라서 몇 번이고 벼슬을 하라고 했지만, 이황 선생님께선 70회나 벼슬을 사양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듣고 이황 선생님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 정치현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 시대 사람이었더라면 벼슬을 준다고 했을 때 반드시 조정에 나가 정치를 했을 것이다. 또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황 선생님께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셨는지 자신의 발자국만 따라오라고 하셨다. 나는 이황 선생님을 두 번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선생님의 발자국만 졸졸졸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덕사라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는 이황 선생님과 선생님의 제자의 위패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신기해서 그곳을 빠꼼히 들여다봤다. 이황 선생님께선 내가 왜 이곳에 널 데려왔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시곤 내 곁을 살며시 떠나셨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그 후로는 이름과 건물만 보고 바람과 같이 스쳐지나갔다. 지방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한 시사단을 보고 내 지갑에 있는 천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을 보았다. 그림이 일치해서 아까 가이드분께서 하신 말이 떠올랐다. 이곳은 정조임금이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본 장소였다. 나도 이곳에서 시험을 보고 임금이 직접 뽑는 11명 안에 들고 싶었다. 나는 지금의 대통령을 정조임금으로, 나를 지도해주시는 선생님들을 퇴계 이황 선생으로 본 삼아 꼭 세계에서 11위 안에 드는 멋진 인물이 될 것이라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역락서재이다. 이곳에 들어서니 앞이 막막했다. ‘이젠 이황 선생님도 내 곁에 계시지 않는데 이곳을 어떻게 해석하지?’ 그런데 이곳을 관광하시던 어떤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대해 나와 친구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이곳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함께 세운 곳이었다. 특히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하셨다. 또 이곳 단에 올라가 앉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고, 시집도 잘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처음에 시집을 잘 가기 위해 그곳에 앉았지만, 5분이 지나고 보니 내겐 ‘겸손’이라는 단어만 남았다. ‘겸손하게 살라고 문을 낮게 지었나?’라고 생각하며 이 문을 나섰다.
이황 선생님과 관련된 재밌는 설화를 하나 알고 있다. 이황 선생님의 제자에는 이이도 있었다. 이황의 학풍이 워낙 뛰어나 배우러 왔던 이이는 자신이 알고자 했던 내용과 거리가 멀어 나왔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도산서원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보고 다짐했다. 이황 선생님께서는 선조가 총애한 것을 보답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써주셨지만, 나는 이황 선생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이황 선생님께 꼭 책을 선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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