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나라 회원〈전남 곡성 옥과고등학교4-H회〉
2008년 3월 한반도는 종이컵 속의 초들로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한미FTA의 굴욕적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들의 집회였다. 이 촛불들 사이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나, 그 조각조각의 붉은 마음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농촌이 살아있는 대한민국!
처음에는 그저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의 확산을 걱정했었지만, 깊게 알아갈수록 나는 농촌의 현실이 더욱 시급한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FTA 체결로 인해 저가의 농산물이 수입된다면, 온 정성을 들여 가꾸는 우리의 농작물이 그 앞에 맥을 추지 못할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수입 농산물이 우리 농산물에 비해 질적으로는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저렴함 때문에 우리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유리한 쪽을 택하는 서민들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수입 농산물들로 인해 대한민국 농가가 무너지고, 우리의 식량이 모두 수입을 통해 채워진다고 가정해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것이 지금 당장 돈을 절약할지 몰라도 전쟁이 나거나 수입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날에는 우리의 숨통을 죄어올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농촌은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농촌 현실은 어떠한가? 신경림 시인의 ‘농무’라는 시의 시구처럼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모두들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것은 ‘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주기를 바랄뿐이다.
나는 농촌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또 농촌 마을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네 깊은 전통도 아름답게 여긴다. 처음부터 농촌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회색빛 도시의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간혹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그곳 생활은 모든 게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농촌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생겼다. 부모님의 전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중학교 3학년 때 시골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전교생 17명의 작은 학교가 있던 나의 두 번째 고향, 금오도!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야하는 곳에 있는 조그마한 섬마을이다. 물론 섬이다보니 바다에 얽힌 추억도 많다. 그러나 반농반어의 마을이었기에 농촌 생활에 대한 추억은 더욱 많다. 봄이면 셀 수 없는 봄나물에, 여름이면 우리 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온갖 채소들, 가을에는 황금 물결치는 들판의 풍성함, 겨울에는 함께 모여 고구마를 구워 먹던 아름다운 추억을 내게 새겨놓았다.
도시와는 사뭇 다른 ‘이웃’의 개념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1분 거리에 모여 사는 집들이 많았던 마을인지라, 옆집 새댁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 가족에게는 늘 할머니들의 손에서 자란 풍성한 먹을거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제 엄마의 언니가 되어버린 이 여사님은 늘 나물을 캐다 주셨고,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직접 기르신 것을 가져다 주시는 분들도 많았다.
더 오래 섬에 머물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왔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농촌에 있는 지금의 학교를 선택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합창소리로 들리는 지금의 이 시골 학교가 더 좋다. 형식적인 도시학교의 클럽활동 시간보다 흙냄새 맡을 수 있는 우리 학교의 4-H활동이 훨씬 좋다. 나폴레옹이 네잎클로버를 통해 행운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가 만난 네잎클로버는 명석한 두뇌(智)와 충성스런 마음(德)과 부지런한 손(勞) 그리고 건강한 몸(體)을 통해 나에게 더 큰 행운을 가져다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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