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1 월간 제715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수천 명이 학살당하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 지방에는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도쿄, 요코하마, 미우라 일대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거대한 해일이 휩쓸었으며 수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이 재난으로 불에 타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만 해도 20만 명이 넘었고, 이재민은 16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전기, 수도, 전화, 철도 등이 모두 붕괴되었고, 병원과 학교도 파괴되어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이재민을 수용할 곳이 없었다.

유언비어를 사실화한 일본언론

그런데 9월 1일 오후 1시쯤부터 일본에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대. 조선인들이 폭탄을 가지고 다니는데, 건물에 분필로 표를 하면 뒤따라온 사람이 폭탄을 던진다는 거야.”
“조선옷을 입은 여자가 우물에 독약을 넣었대. 그리고 조선인들이, 타지 않고 남은 집에 불을 지르러 다닌다는 거야.”
하지만 조선인이 가지고 다닌 것은 폭탄이 아니라 사과였으며, 건물에 분필로 표를 한 것은 청소 회사 직원이나 신문·우유 배달원들이었다. 그리고 우물에서는 독약을 넣은 게 아니라 쌀을 씻은 것이었다. 소방본부가 조사해 보니 대지진 이후 일어난 23건의 화재에서 방화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런데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퍼져 관동 지방 전체를 휩쓸었다.
유언비어를 사실로 믿게 한 데는 일본 언론이 한몫을 했다. ‘도쿄 일일 신문’ 등 일본 신문들은 “조선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넣을 것에 대비하여 청년과 학생들이 경찰 및 군대와 협조하여 밤새 경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해 조선인 학살을 부추겼던 것이다.
유언비어는 사실처럼 보도되어 9월 2일 오후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분노한 일본인들은 일본도, 죽창, 곤봉, 철봉을 들고 다니며 그 전날 저녁부터 조선인을 보이는 족족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학살 수법은 너무나 잔인했다. 그들은 흉기로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거나 때려 죽였고, 보호해 달라고 경찰서로 뛰어 들어간 사람들까지 찾아내 참혹하게 살해했다.

진실 밝힌 독립신문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은 비밀리에 특파원을 보내 현장 조사를 했는데, 일본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은 총 6661명으로 집계했다. 가나가와 현에서 1052명, 도쿄에서 752명, 지바 현에서 293명, 사이타마 현에서 239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9월 6일자 신문에서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관동 지방에 노동자와 학생이 각 3000명씩 살고 있는데, 6000명 가운데 사망한 조선인은 단 두 명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관동 지방에는 적어도 3만 명 이상이 살고 있고 6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대학살 소식이 조선에 전해져, 분노한 국민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날까 걱정했던 것이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조선인이 일본인을 죽이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은 일본의 고위층과 경찰이라면서요?

일본의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와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는 9월 1일 밤늦게까지 대지진 현장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피해 지역이 생지옥과 다름없었기에 분노한 일본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막고 질서를 회복하려면 비상수단으로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계엄령을 선포하려면 그만한 구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인들을 부추겨 조선인 학살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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