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이씨, 박씨…. 우리나라에는 300개에 가까운 성이 있는데, 남북한을 통틀어 모든 사람들이 성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성은 고대 중국에서 처음 생겼다. 큰 공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에게는 임금이 특별히 성을 내렸다. 그래서 성은 특권층만 갖고 있었는데,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겨우 백 명밖에 안 된다고 ‘백성’이라는 말이 생겼다. ‘백 가지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성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고, 또 스스로 성을 만들어 쓰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리하여 ‘백성’은 온 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명나라가 중국을 다스릴 때는 성이 1968개나 되었다고 하니 엄청나게 늘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삼국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 고구려에서는 나라 이름을 따서 ‘고’라는 성이 처음 생겼고, 백제에서는 부여에서 왔다고 하여 부여 씨, 신라에서는 혁거세·탈해·알지 등의 시조에 의해 박씨·석씨·김씨 등이 생겼다.
하지만 삼국 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 등의 특권층만 성을 사용했고 일반 백성들은 성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 왕건이 호족과 신하들에게 성을 지어 나누어 줌으로써 성이 많이 늘어났다. 특히 고려 초인 문종 때 ‘성이 있는 사람들만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법령을 내려 벼슬아치들은 대부분 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평민들까지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성을 내려주는 것을 ‘사성’이라고 하는데, 왕건이 성을 내려주어 신숭겸은 평산 신씨, 배현경은 경주 배씨, 홍유는 부계 홍씨의 시조가 되었다. 왕건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한꺼번에 성을 지어 주었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다.
어느 날, 왕건은 신하들에게 목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목천 사람들은 후백제의 유민들이었다. 그래서 고려의 태조 왕건에 맞서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왕건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모두 고려 백성으로 받아 주고, 반란을 일으켜도 용서해 주었건만, 내가 인간적으로 대해 줘도 짐승 같은 짓으로 보답하니 그에 걸 맞는 성을 지어 주지. 목천 사람들은 상씨, 돈씨, 장씨, 우씨 등 네 개의 성만 쓰도록 하라.”
이리하여 목천 사람들은 코끼리를 뜻하는 상(象)씨,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노루를 뜻하는 장(獐)씨, 소를 뜻하는 우(牛)씨 등의 성만 사용하게 되었다. 왕건은 목천 사람들에 대한 보복으로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지어 준 것이다.
목천 사람들은 한동안 이런 수치스러운 성을 사용하다가 나중에 象씨는 尙씨로, 豚씨는 頓씨로, 獐씨는 張씨로, 牛씨는 于씨로 음만 살려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꾸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왕건으로부터 성을 받은 충주 어씨는 왜 잉어를 먹지 않는 거죠?
고려 초에 충청도 제천 땅에는 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지씨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기이한 털로 덮여 있는데다, 양쪽 겨드랑이에도 털이 세 개가 있었다. 태조 왕건이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몸을 살펴보았더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그가 잉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어(魚)씨 성을 내려 주었다. 그 뒤부터 충주 어씨 집안에서는 어충익이 잉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잉어를 먹지 않게 되었다.
잉어를 먹지 않는 성씨로는 파평 윤씨와 평산 신씨가 있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윤신달이다. 그는 경기도 파평(지금의 파주시)의 용연이라는 연못에서 윤온 할머니가 건진 금궤에서 나온 아이였다. 그때 그의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있었고, 손에는 ‘윤’자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파평 윤씨 집안에서는 윤신달의 양쪽 겨드랑이에 81개의 잉어 비늘이 있었다고 잉어를 먹지 않게 되었다.
한편, 평산 신씨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죽은 신립 장군의 금동곳이 잉어의 뱃속에서 나왔다고, 조상의 살을 먹은 고기라고 해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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