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5 격주간 제712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31)

공간의 국토와 시간의 국토 - 국토사랑 어떻게 해야 하나 ①
박태순 / 소설가

사진작가 황헌만은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졸업하던 1970년대 초반 무렵에는 ‘예술사진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도시와 문명과 전위예술성(아방가르드)을 추구하는 미술작품성의 포트폴리오였다. 그러던 그가 1979년에 첫 사진집을 펴내게 되는데 그 책의 제목이 ‘향취(鄕趣)’였다. 고향의 정취라는 뜻이 되겠는데 어찌 된 까닭이었을까. 도시 아닌 농촌, 문명 아닌 민속, 전위예술성 아닌 국토의 역사와 문화를 그의 카메라워크로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도시사진, 문명사진, 전위예술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넘쳐나지만 ‘황헌만 사진’은 남들이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 경지를 새롭게 열게 된 것.
우리 국토에서 역사, 민속, 전통과 관련되는 문화유적이라든가 통과의례, 세시풍속들을 그는 ‘카메라 만년필’로 기록해오게 되었는데, 이미 방대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축적했다. 그의 사진집으로는 ‘장승’, ‘초가’, ‘조선땅 마을지킴이’, ‘한국 세시풍속’, ‘도산서원’ 등이 있고, 그런가하면 어린이들에게 우리 국토의 자생식물이라든가 생태환경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동화집을 펴내기도 했는데, ‘민들레의 꿈’, ‘바람이 찍은 발자국’과 같은 책은 그가 직접 사진을 찍고 그리고 글을 쓴 것이었다.
‘박태순 글-황헌만 사진’을 내세운 신문연재라든가 잡지연재, 그리고 단행본 발간의 국토기행집이 지난 1980년대로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왔는데 여기에 빛바랜 ‘황헌만 사진’ 하나를 뽑아보았다. 그의 첫 사진집 ‘향취’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1970년대 초에 덕유산 자락에서 영상채집된 것이었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雪川面) 일대는 참으로 교통 불편한 심심산골의 두메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직행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고 전주라든가 영동 또는 김천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의 험한 길을 꾸물꾸물 파고들어야만 했다. 찰가난과 샤머니즘과 말단 벼슬아치들의 억압과 부정부패가 산골마을을 암담하게 짓누르고 있었다고 나는 무주구천동 기행문에서 썼다. 그러나 그곳에는 두 가지의 ‘참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산골 사람들의 한없는 순박함, 산골 풍광의 대책 없는 수려함…….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 집 짓고…….”
1960년대에는 이런 가사의 유행가 ‘물레방아 도는 내력’이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황헌만 사진에 보이는 초가는 낡았고 너저분하고 옹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할머니-할아버지-어머니에 둘러싸여 밥상을 받고 있는 꼬맹이 아기의 표정은 밝고 평안해 보이기만 한다. 사진작가는 초라하고 가난한 겉모습의 풍경이 아니라 넉넉하고 단란하고 애정에 넘치는 집안 식구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온갖 농기구들과 가물(家物)들이 보여주는 살찐 살림과 농가 삶터의 풍요로운 정경을 영상 채집하고자 한 것이었으리라. 물질적인 가난을 변상하고도 남을 정신적인 부유가 이 사진에는 있었다.
공간의 국토와 시간의 국토는 엄청나게 달라져가기만 한다. 덕유산 기슭의 공간국토에는 ‘반딧불이 공원’이라든가 스키장, 리조트, 펜션 등이 꽉꽉 들어차 있다. 황헌만 사진의 초가와 그러한 초가마을들이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못해볼 지경이기만 하다. 무주 일대는 도시생활에 시달린 이들의 관광유원지로 탈바꿈되어 각광을 받고 있지만, 과연 무주 토박이들의 고향이 이러한 레저 관광지역이 된 것이 그 원주민들에게 바람직한 개발이고 발전이기만 한 것인지 되묻게 되기도 한다.

덕유산 기슭의 초가마을(황헌만 사진).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는 새마을운동은 국토 공간 속의 ‘옛마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오늘에 와서는 망실된 국토 시간 속의 ‘민속마을’을 되찾고자 지자체마다 안간힘이지만 되살려낼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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