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1 격주간 제711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30)

꽃피는 산골의 그림을 위하여 - 김억 국토목판화 읽기 ④
박태순 / 소설가

<김억 목판화 '산골마을 2'. 좌청룡 우백호 남현무 북주작의 풍수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산골마을의 정든 땅 언덕 위에 논틀밭틀 장만하고 오막살이 집 한 채로 너끈하게 행복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은 사람들이 애국가보다도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과 함께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 합창하며 함께 감격해 하는 곡조이도 하다. 1926년에 16세의 소년 이원수가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이 동요가 그 뒤로 계속하여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원수는 경남 창원과 마산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데 과연 그가 그리워하는 ‘꽃 피는 산골’은 지금도 오롯하게 남아 있을까.
그의 고향은 더 이상 산골이 아니라 분주하고 복잡하기만 한 도회지로 변해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원수 선생은 노년기에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문화예술인촌에서 기거하셨는데 황순원, 서정주 선생 등과 한동네 삼이웃 사이로 지내셔서 정초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가 이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적이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잃어버렸어. 실향이 아니라 고향에 그대로 살고 있다 해도 더 이상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는 아니게 되어버렸단 말이야. 더구나 어린 시절은 지나가 어른이 되어 있기도 하고.”
‘고향의 봄’이라는 제목은 어린 시절의 옛 시간과 꽃 피는 산골의 옛 공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부터 환기시킨다. 꽃 대궐 차린 동네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기만 한 환상의 장소가 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되레 더욱 에덴의 천국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의 꽃 대궐에 사무쳐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김억 화백이 처음부터 목판화에 몰두하였던 것은 아니라 한다. 수묵담채의 산수화라든가 문사철(文史哲) 겸비의 문인화는 전통시대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도 그 심오한 동양예술정신을 발휘하도록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거대담론의 국토미술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아니라 한다. 사생(寫生) 위주의 풍경화라든가 실경산수의 소품들이 더 아기자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국토목판화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명제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쪽은 아니라 한다. ‘우리가 돌아갈 자연은 과연 어떠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연이란 생태환경, 인문환경, 문화역사환경을 함께 지니는 그러한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국토의 재발견을 미술작업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국토목판화 작업에 더욱 매달리기 위해서였다. 원래 그의 고향은 충남 당진 쪽이었다고 하는데 안성 땅은 ‘꽃 피는 산골’의 새로운 고향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돌아가는 고향이 아니라 찾아내는 고향이라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국토목판화는 꽃 피는 산골에서 시냇물과 강물의 마을로 나오고 다시 전국전토의 대처를 찾아다니는 작업이 되고 있다.
꽃 피는 산골의 그림을 위하여 그는 방방곡곡을 뒤져보고 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듯이 ‘고향의 봄’은 타향살이의 사람들에게 애틋한 봄맞이 풍경으로서 준비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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