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즐거움 넘어선 인간에 대한 탐구
영화는 임종 직전의 데이지(케이트 불란쳇)가 딸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노인으로 태어나서 아이로 죽는 터무니없는 설정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필터처럼 데이지의 회상이 이어진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말 뉴올리언즈. 그해 여름 80세의 외모를 가진 아이, 벤자민이 태어난다. 어머니는 벤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분노와 벤자민의 기형아 같은 외모에 경악하여 벤자민을 양로원 현관에 버린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퀴니에게 발견된 벤자민은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친구로 살아간다.
해가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12살 때 60대 외모를 가진 벤자민은 어느 날 6살의 데이지를 만난다. 그리고 점점 사랑에 빠진다. 중년의 모습이 된 벤자민과 데이지는 그들의 외모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지점에 만나고,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딸아이가 태어난다. 하지만 벤자민은 점점 자신이 어려져 결국 딸과 구분이 안 될 것을 두려워 해 데이지를 떠난다.
할머니가 된 데이지. 어느 날 연락을 받고 간 아동 보호소에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어린 벤자민이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다. 데이지는 벤자민을 보살피고 결국 아기로 변한 벤자민은 데이지의 품에서 죽는다.
‘벤자민 버튼’은 중반까지 평범한 멜로 영화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벤자민이 유아로 변하는 순간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데이지의 품에 있는 어린 벤자민의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보인다. 자신이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끝없는 사랑을 하는 존재와 그 사랑을 끝없이 받아야하는 또 다른 존재의 의문이 마치 윤회의 고리처럼 연결된다.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서 끝없는 사랑을 주고받았던 존재일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
시간은 시작점과 흘러가는 방향의 교차점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정립시킨다. 그 관계 속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은 그 사랑을 끊임없이 탐구할 뿐이다.
〈손광수 /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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