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이름난 장수였던 유극량이 무과에 급제하여 대장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유극량을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고백할 것이 있다. 내가 사실은 재상인 홍섬 대감 댁 여종이었단다. 실수로 옥술잔을 깨뜨렸다가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 그 집에서 달아났지. 한동안 숨어 살다가 양반집 자제인 네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여 너를 낳았던 거야.”
어머니는 숨겨왔던 과거의 비밀을 털어놓고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유극량은 어머니의 고백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한번 노비가 되면 그 후손들도 대대로 노비가 되어야 했다. 어머니가 노비이고 아버지가 양반이라 해도 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벼슬살이도 못하고 평생 천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니 유극량이 큰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극량은 곧바로 홍섬을 찾아가 자기 출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대장 벼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말없이 듣고 있던 홍섬은 뜻밖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잘못 알고 찾아왔네. 우리 집에는 자네 어머니 같은 여종이 없었다네.”
그리고는 유극량을 돌려보낸 뒤 유극량 어머니의 종 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홍섬에게 크게 감동을 받은 유극량은 평생 홍섬을 주인처럼 섬겼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노비는 흔히 ‘종’이라고 불리었다. 가장 밑바닥 계층인 천민으로서, 남자 종인 ‘노(奴)’, 여자 종인 ‘비(婢)’가 합쳐져 노비라고 일컬어졌다. 노비는 관청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 집에 속한 사노비로 나눠지고, 사노비는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로 나뉘어졌다.
외거노비는 평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어, 그 중에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노비도 있었다. 그 재산의 일부를 흉년 때 나라에 바쳐 양민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종 때 충청도 진천 땅에 살았던 사노비 임복이다. 그는 곡식 1만 석을 소유한, 지금으로 치면 재벌 노비였다. 그런데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곡식 2천 석을 나라에 선뜻 바친 것이다.
성종이 보기에 이 사람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그래서 성종은 임복을 대궐로 불러 물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줄 테니 말해 보아라.” “제게는 아들 넷이 있습니다. 아들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성종은 임복의 소원을 들어 주려고 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곡식을 바쳐 양민으로 만들어 준다면, 너도나도 주인을 배신하고 곡식을 바쳐 양민이 되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분 제도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종은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임복은 양반도 하지 못한 아름다운 선행을 했소. 당연히 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성종은 임복이 곡식 1천석을 또 바치자, 네 아들은 물론 임복까지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뒤 전라도 남평의 사노비 가동이 곡식 2000석을 바쳐 양민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했지만,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분 제도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신분의 벽이 높았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 조선 중기부터는 곡식을 내놓고 노비의 신분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 노비도 소와 말처럼 사고팔았다면서요?
노비는 조선 시대에 땅, 집과 더불어 중요한 재산으로 취급되어 양반들끼리 사고팔고 자식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선왕조실록’ 1398년 7월 6일자에 “노비의 값은 아무리 비싸도 오승포 150필에 불과한데, 말 한 필 값은 오승포 400~500필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에는 노비의 값이 말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는 노비의 값이 형편없이 떨어져, 소나 말 한 마리와 노비 열 명을 맞바꾸었다. 그러다가 동학혁명 때는 노비의 값이 올라 소 한 마리에 노비 다섯 명을 맞바꾸었다. 사람을 마소처럼 사고팔았다는 것이 끔찍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제도가 완전히 폐지됨으로써 이러한 인신매매는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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