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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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우리 농촌재건을 위한 지원과 4-H회원 교육에 한미재단이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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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재단은 6·25전쟁 이후 우리 농촌의 재건을 위해 미국에서 퇴역장성 및 독지가들이 결성한 단체다. 미국민간원조단체로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약 26년간 한국의 4-H를 지원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2월 2일 아이젠하워 원수는 3일간 전선을 시찰한 후 미 제8군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을 지속적으로 원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후 미국에서 퇴역장성과 뜻을 함께하는 유지들로 한국원조민간단체를 조직키로 하고, 그의 동생 밀톤 아이젠하워를 주축으로 해 1953년 8월 미국내 법인단체로 한미재단을 발족시켰다.
한미재단 한국사무소는 1953년 8월 20일 개설돼 초대소장에 브룩스 박사가 부임했다. 이 재단은 영리·종교를 초월한 순수 민간지원단체로서 전후 복구를 위해 다방면에서 활약을 했는데 농촌사회건설을 위한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농촌건설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사업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농촌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외교육사업인 4-H운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고아 및 양로사업, 주택건설, 병원 의약품 공급, 장학금 지급, 해외 유학안내 등 전란으로 파괴된 한국의 재건을 위해 지원했다.
그 중에서도 4-H에 대한 지원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61년 서울 신림동에 경사지 6600㎡을 임대해 축산과 계단식 개간 및 단기 농공훈련을 실시했다.
또 같은 해 11월부터 경기도 소사에 7만1300㎡ 규모의 한미재단 훈련농장을 설치해 4-H회원들을 대상으로 계단식 개간, 흙벽돌 주택, 농사, 축산 교육을 했다. 그리고 여회원들에게는 식품관리, 재봉 등 생활개선과제교육을 실시했다. 한미재단 농장훈련은 1979년까지 3620명의 훈련생을 배출했다.
한편 1947년 미군정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에 4-H를 처음 보급했던 앤더슨은 1953년 12월 군복무를 마치고 내한해 한미재단(2대 소장 W.C.크락손)의 재정협조 및 한국민사원조사령부와 농림부의 행정적 지원을 얻어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를 창립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앤더슨은 1954년부터 12년간 한미재단4-H사업 고문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4-H사업을 위한 모금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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