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1 격주간 제707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26)

‘독서당 계회도’ 그림 새롭게 읽기
 박태순 / 소설가

<독서당계회도(보물 867호, 서울대학교 소장). 약수동, 금호동, 옥수동은 모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던 동네였고, 두모포 포구가 있던 한강을 ‘동호’라고 불렀는데 산수화의 그림으로서만 만나볼 수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강일 것이다. 전통시대로부터 서울의 한강에 대해서는 경강(京江)이라 불러왔는데 대체로 3개의 권역으로 분류해놓고 있었다. 동호(東湖, 두모포)-용산강(노량진)-서강(마포)의 역할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두모포는 서울에서 춘천의 북한강이라든가 충주의 남한강으로 통하는 내륙 수운의 포구를 이루고 있었고, 노량진은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육로 교통의 나들목이었고, 서강의 마포(삼개나루)는 서해 바다로 나가는 해운의 항구가 되고 있었다.
두모포는 두뭇개-두물개라 하던 곳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나게 된 지명이었다.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역이어서 두물개라 했던 것인데, 성동구 옥수동의 한강변 일대였다. 두모포의 상류 쪽으로는 뚝도(뚝섬)가 있었고, 하류 쪽으로는 닥나무 재배지를 이루고 있었던 저자도(楮子島, 닥섬)가 있었다. 지금에는 두 섬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강을 상하에서 막아주어 마치 호반과도 같은 경관을 연출해주고 있었기에 ‘동호’라는 운치 있는 명칭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동호대교’라는 한강 다리는 있지만 정작 동호는 없게 되었다. 압구정동이라는 동네는 있지만 세조 시대의 간신배 한명회가 세운 정자인 ‘압구정’은 정작 남아 있지 않는다. 압구정 맞은쪽의 한강 건너편 동호의 응봉산에는 ‘독서당’이란 유명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독서당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독서당길’이란 명칭을 붙인 가로는 존재한다.
용산구 한남동 76-6번지의 한남로에서 성동구 행당동 331-9번지의 행당초등학교에 이르는 길인데 1979년에 서울특별시 공고 제26호로 ‘독서당길’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이런 명칭은 물론 이 도로의 언덕 위에 있었던 독서당 건물에서 유래한다.
‘독서당 계회도(讀書堂契會圖)’라는 그림은 보물 제86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당대의 명사들이 독서당에서 계모임을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선비들의 계모임이 자못 호방하기 그지없다. 옥수동 앞 한강에 한가롭게 떠 있는 17척의 배가 그림 속에 들어와 있고, 송림에 둘러싸인 독서당과 계회의 모습이 산수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전서체로 ‘독서당계회도’라고 써놓고, 중단에는 근경(近景)과 중경(中景)을 세밀하게 그렸고, 하단에는 참가자의 명단을 적어놓았다.
좌목(座目)에 적혀있는 참석자는 윤근수(尹根壽), 정유일(鄭惟一), 정철(鄭澈), 구봉령(具鳳齡), 이이(李珥), 이해수(李海壽), 신응시(辛應時), 홍성민(洪聖民), 유성룡(柳成龍) 등 9인이다. 1570년(선조3) 가을에 임금의 특별허락을 받아 독서당에 들어와 공부를 하던 이들이 모처럼 풍류와 흥취에 넘치는 모임자리를 열었을 뿐 아니라 이를 그림으로 남기게 했으니 경강 중에서도 동호와 두모포 일대 명소를 오늘에 살필 수 있게 한다.
‘한강 르네상스’ 사업을 서울시가 전개하고 있는 중인데 동호 두모포 포구의 복원이라든가 독서당길의 지정에서 더 나아가 독서당 건축물의 재현 방안 같은 프로젝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늘의 동호대교 일대의 스카이라인은 참으로 어지럽기만 하고 두모포가 자리 잡았던 한강변의 도로사정은 복잡하고 소란스럽기만 하다.
‘독서당 계회도’가 그려지기 1년 전인 1569년 3월 4일에는 안동 고향으로 낙향하는 퇴계 이황을 전송하기 위해 독서당과 저자도와 봉은사 일대에서 박순, 기대승, 유성룡 등이 전별연을 벌이기도 했다. 독서당을 잃어버린 한강이 너무 가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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