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 ‘최북’이라는 이름의 화가가 있었다. 그는 메추라기 그림을 잘 그려 ‘최 메추리’, 산수화를 잘 그려 ‘최 산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선의 자연, 조선의 산수를 잘 그린 화가답게 최북은 금강산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어느 날, 금강산을 찾아간 최북은 금강산의 절경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해 그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구룡연에 이르러 이렇게 부르짖었다.
“천하 명인 최북이 천하 명산에서 죽으리라!” 그리고는 갑자기 구룡연 못 속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저, 저 사람이…….” 그때 주위에는 금강산 유람을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구조되어 최북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최북은 평양이든 동래든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했는데, 그림 값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인데도 그림 값을 조금 내놓으면 최북은 화를 벌컥 내며 자기 그림을 박박 찢어 버렸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닌데 그림 값을 후하게 내놓는 사람이 있으면 껄껄 웃으며, “저 사람은 그림 값도 모르는군!”하면서 돈을 조금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최북은 성품이 강직하여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못 견디게 싫어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고 거절했다. 하루는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했다. “네가 산수화를 잘 그린다면서? 나는 신선이 나오는 산수화를 좋아하니, 내가 좋아하는 산수화를 그려 다오. 그림 값은 후하게 주마.” 최북은 아니꼽다는 듯 벼슬아치를 노려보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신선을 보지 못해 그 따위 그림은 그리지 못하오. 그리고 나는 그림 값을 후하게 준다고 해서 거기에 혹하는 장사꾼 화가가 아니오.” 최북의 말에 벼슬아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뭐, 어쩌고 어째? 환쟁이 주제에 내 청을 거절해? 건방진 놈! 네놈을 죽인다고 해도 내 청을 끝까지 거절하겠느냐?”
벼슬아치는 금방이라도 죽일 듯 최북을 위협했다. 최북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붓대를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붓대로 자신의 한쪽 눈을 콱 찔러 버렸다. 한쪽 눈에서는 벌건 피가 쏟아졌다. “자, 이래도 내게 신선이 나오는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요구할거요? 눈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걸 아시겠지?” 벼슬아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허허, 천하에 독한 놈이네. 미치광이야, 미치광이…….”
최북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였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붓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고 지었다. 자가 ‘칠칠(七七)’이어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애꾸눈 최칠칠’, ‘미치광이 최북’이라고 불렀다.
<신현배/시인, 아동문학가>
♠ 조선의 화가들은 모두 최북처럼 그림을 팔아 생활했나요?
조선 시대에는 모두 세 종류의 화가가 있었다. 첫째는 사대부 출신의 문인 화가들이다. 이들은 왕족이나 양반층으로서 자기 생활을 하며 취미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강희안, 이정, 신사임당, 윤의립, 이징 등이 그들이다.
둘째는 나라에서 세운 관청인 도화원(성종 때부터 도화서로 이름이 바뀜)에서 일하는 화원들이다. 이들은 나라에서 필요한 왕의 초상화, 공신의 초상화, 국가의 행사를 기록한 그림인 의궤, 지도 등 갖가지 그림을 그렸다. 도화원 출신으로 유명한 화가는 안견, 이상좌,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이 있다.
셋째는 관청에 소속되지 않고 그림을 팔아 생활하는 화가들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 이런 화가들이 나타났는데,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거나 양반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최북, 김명국 등이 이런 부류의 화가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