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1 격주간 제705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24)

낙동강 상류 죽계천의 달밭골  ②
 박태순 / 소설가

‘양백지간(兩白之間)’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태백산과 소백산에 ‘백’이라는 글자가 함께 들어 있으니 이를 합쳐 ‘양백’이라 한다. 이러한 양백으로부터 산줄기와 물줄기를 받아내는 경북 북부지역을 이처럼 멋스럽게 지칭하기도 했다.
낙동강은 양백에서 흘러내리지만 시원지가 참으로 여러 군데이다.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본류와 봉화읍 닭실(유곡)에서 흘러내리는 내성천 지류는 양백 중에서도 태백산 계통이다. 소백산 쪽은 어떠한가. 소백산 연봉을 서쪽에서부터 꼽아보면 도솔봉-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선달산을 통틀어 하나의 산악군을 이루고 있다. 산은 첩첩이고 물은 겹겹이다. 소백산을 모천(母川)으로 하는 하천들 또한 태백산 계열 못지않게 복잡다단하게 영주시의 풍기와 순흥, 부석 일대를 헤집는다.
도솔봉과 죽령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남원천(南院川), 연화1봉과 2봉 쪽에서 발원하는 금계천(錦溪川), 비로봉과 국망봉에서 시원되는 죽계천(竹溪川), 부석사의 진산인 봉황산과 선달산 일대의 시냇물을 모으는 단산천(丹山川)을 대표적으로 꼽게 된다. 이 하천들은 영주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앞에서 내성천과 합수되고, 다시 예천 삼강면에서 낙동강 본류와 합류된다. 지난번에는 내성천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주로 죽계천을 중심으로 하여 소백산 계통 물줄기들을 살펴본다.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1440m)과 국망봉(1421m)의 남녘 기슭에는 달밭골이라는 두메산골이 있다. 달빛으로 농사를 짓는 월전(月田) 골짜기라니…. 워낙 심산유곡이라 햇빛은 잘 들지 아니하고 달빛만 밝고 맑게 비추는 곳일까. 이 달밭골로부터 태어나는 시냇물이 곧 죽계천을 이루게 되는데, 고려시대의 문인 안축이 경기체가 ‘죽계별곡’을 지어 그 빼어난 경승을 찬탄했다. 초암사(草庵寺)는 신라 의상대사가 초막을 지어 기거하면서 좋은 절터를 찾아다닌 끝에 부석사를 창건하게 되었다는 연기설화를 지닌 곳이다. 죽계구곡(竹溪九曲)의 제1곡은 바로 초암사 앞 골짜기가 되는데 물속에 잠긴 반석 아래쪽에는 ‘제일수석(第一水石)’이라는 행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로부터 제9곡인 삼괴정에 이르기까지 약 2km의 계곡이 역대 시인묵객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지금에는 자동차도로가 개설되어버린 관계로 옛날의 계수미(溪水美)를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게 되어 있는 형편이다.
죽계천은 조선시대에 크나큰 시련과 영광을 함께 껴안는다.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양백지간 북쪽의 영월 청령포에 유배시키고 여섯째 동생인 금성대군을 양백지간 남쪽 순흥에 귀양 보낸다. 하지만 조카와 삼촌이 연통하여 모반을 획책한다는 밀고에 단종만 아니라 금성대군도 처참하게 죽는다. 순흥 고을 자체가 아예 없어지고 양백지간 선비사회도 풍비박산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1456년(세조2)의 일이었는데, ‘피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죽계천변에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것은 1543년이었다. 사람들의 피로 넘쳐나서 죽계천이 ‘피내’가 되었던 것인데 90년이 채 못 되어 이 하천이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주세붕이 ‘피끝’에 세운 이 서원은 이황에 의해 최초의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어 조선 유교문화의 센터를 이룬다. 사림파는 이로부터 훈구파를 역사로부터 완전 퇴장시키게 되는데 죽계천이 증언해주는 바가 어찌 되는 것일까. 소수서원의 죽계천변 맞은편에 ‘선비촌’이 새롭게 조성돼있는데 오늘의 산업기술문명이 옛 선비들의 산림정신을 어찌나 계승할 수 있으려는지 묻게 된다.

소수서원 선비촌(영주시 제공 사진). 옛 선비정신을 오늘에 잇기 위해 조성한 역사문화 민속촌으로 숙박과 임대도 가능하지만 이용객들이 많지 않아 아쉽다 한다.


착오로 인해 연재 횟수가 1회 늘어 본래대로 (24)회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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