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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격주간 제7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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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 역사 속으로…> 농사원 발족, 4-H활성화 발판 마련 |
정부의 4-H육성사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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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4-H회원들이 4-H기를 앞세우고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고 있다.> |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4-H는 광복 직후 낙후된 농촌의 부흥과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1947년 구자옥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군정관인 앤더슨 중령, 이진목 경기도문정관 등이 미국의 4-H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1952년 12월 4-H운동이 국가적인 농촌정책으로 채택되면서 이 운동은 경기도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4-H사업은 농림부의 농정국 농업경제과에서 전담했다. 또 4-H운동 민간추진기구로 1953년 11월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재 한국4-H본부)를 조직하고 연말에 제1회 4-H중앙경진대회를 개최했다.
1957년에는 농사원이 발족되면서 농사원은 농사교도사업의 일환으로 4-H구락부 육성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1957년 2월 법률 제435호로 농사교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같은 해 5월 농사원 직제가 대통령령 제1275호로 공포되었다. 농사원 개원식은 6월 15일 권농일을 맞아 거행되었다.
농사원에는 4-H를 관장하는 주무과로서 교도국에 청소년과가 설치되었다. 참고로 1958년 시군농사교도소는 167개소였고 농사교도원과 생활개선교도원은 685명이었다.
농사원이 발족되면서 기존 4-H회의 조직정비와 유능한 자원자도자 및 소년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교육이 강화되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4-H구락부실태조사였는데, 1958년 12월 말 전국의 4-H회는 3729개, 회원은 14만2595명, 자원지도자는 6528명으로 나타났다.
농사원은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의 후원으로 1958년 4월부터 7월까지 4-H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640명의 도-시군농사교도원 도단위 4-H연찬회를 개최했다.
농사원이 발족하기 이전에는 4-H회원 수에 비해 지도자 수가 적어 지도자들이 마을을 방문하는 방문지도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58년 4-H자원지도자가 6528명이었던데 비해 1961년에는 약 3배 이상이 증가한 2만25명이었다. 농사원은 농촌청소년지도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4-H중앙연찬회, 4-H자원지도자강습회, 4-H과제훈련 등을 중앙뿐만 아니라 각 시도별로 혹은 지역별로 실시했다.
1961년에는 농사원 개편으로 청소년과가 없어지고 4-H사업은 농사원 교도국 계획과에서 관장하게 되어 농촌청소년지도사업의 위축을 우려했으나 전국 농촌에서는 4-H운동이 오히려 급성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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