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15 격주간 제704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왕 앞에서 술을 엎질러 귀양 간 천하의 술꾼 오도일

오도일은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다. 머리가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 임금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술을 몹시 좋아했다. 술을 한번 마셨다 하면 취하도록 마셔 이런저런 실수가 많았다. 술에 취하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져, 어느 때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기도 했다. 이런 술주정 때문에 이조판서 유상운, 정언 이탄 등에게 탄핵을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숙종은 오도일을 용서해 주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어찌 예의를 차리겠느냐? 앞으로는 오도일에게 술을 덜 마시고 매사에 조심하도록 주의를 주어라.”
그런데 얼마 뒤 오도일은 자신의 실수를 덮어 주고 늘 너그럽게 대해 주던 숙종을 화나게 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1697년 4월 22일(숙종 23년), 숙종이 신하들과 함께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였다. 그날 술을 따르는 일을 맡은 관리는 오도일이었다. 그는 며칠 전에도 술 때문에 실수를 해 숙종으로부터 며칠 동안 술을 마시지 말라는 금주령을 받은 처지였다. 그런데 기우제를 올리는 날, 오도일은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잔뜩 마셨다. 이미 술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숙종은 오도일을 보고 화가 몹시 났다. 하지만 꾹 참고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오도일은 제단에 음복주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 넘어지는 바람에 술을 엎지르고 만 것이다. 조정 대신들은 이 사건을 덮어 두지 않았다. 곧바로 상소를 올려 오도일을 탄핵하고 나섰다.
“오도일은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술에 취해 단상에 비스듬히 서는 등 오만방자한 짓을 했습니다. 게다가 공경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음복주를 엎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무엄하게 구는 자는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언제나 오도일을 두둔해 주던 숙종도 오도일이 술을 엎질러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고 일렀거늘, 내 명을 어기고 또 술을 마셔? 뿐만 아니라 임금 앞에서 술에 취해 음복주를 엎지르는 등 방자하게 굴었으니 용서할 수 없다. 의금부에서는 오도일을 잡아들여 귀양을 보내라.”
결국 오도일은 왕 앞에서 술을 엎지른 죄로 전라도 장성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6년 뒤인 1703년(숙종 29년) 2월 14일 유배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사관은 그가 죽은 날, 실록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도일이 장성 유배지에서 죽었다. 오도일은 뛰어난 재주와 빛나는 총명,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풍치를 지녔다. 겉은 소박해 보이나 속은 깨끗했다. 몸을 다스리기를 청백하게 하여 세상에서 그를 인정했다. 술을 몹시 좋아해 취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세상일을 다스릴 뜻이 없어 보였지만, 벼슬길로 나아가 빛나는 명성을 얻었다. 임금도 재주 많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세상에 보기 드문 성은을 입었다.”
 〈신현배/시인, 아동문학가〉

♠ 세종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세종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빚는 것은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며 웃어른을 모시기 위함이고 술의 폐해가 많다며 술을 경계하는 글을 써서 주자소에 인쇄해 전국에 반포했다. 이때가 1433년(세종 15년) 10월 28일이다.
세종은 자신이 직접 쓴 글에서 “술의 해독이 너무나 크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뿐이겠는가. 술은 마음과 의지를 약하게 하고 굳은 뜻을 잃게 한다.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망하게 하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을 파괴하고 생명을 잃게 한다”고 술의 해독을 알렸다. 그리고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술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뒤, “술 마시기를 즐기느라 일을 폐하지 말고, 술을 많이 마셔 병들게 하지 말라”는 당부로 글을 마무리했다.
세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술을 경계하는 글을 써서 세상에 뿌렸지만, 술을 즐기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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