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농촌정책사업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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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가 농촌정책사업으로 채택되면서 전국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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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4-H활동은 경기도지역에 국한돼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6·25전쟁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나 폐허가 된 우리 농촌을 복구하겠다는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다시 불이 붙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4-H운동은 국가적인 농촌정책으로 채택이 되었다. 이로써 4-H는 경기도에서 전국 농촌마을을 대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농림부의 4-H구락부계획 추진은 농정국 농업경제과에서 전담하였는데 이기홍, 정용석, 권태헌 씨 등 여러 사람들이 4-H사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지원했다. 또 경기도에서 4-H보급에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김갑영, 이병춘 씨 등이 농림부 4-H사업을 측면에서 도와가며 4-H가 무엇인지 잘 모르던 중앙인사들에게 4-H를 이해시켜 나갔다.
아울러 한국민사원조사령부 식량농업국에 근무하던 강건주 씨는 4-H구락부사업설계담당관인 쎄리 씨를 보좌하면서 동 사령부와 농림부 간의 4-H구락부 사업추진과 연락사무를 전담하였다. 특히 경기도 수복지역의 4-H를 재조직하기 위해 1953년 봄부터 김갑영 씨와 한 팀으로 경기도 내의 화성, 시흥, 부천, 안성, 양주와 충남 홍성, 당진 등을 현지답사했다.
정부가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오면서 미국경제원조당국인 한국민사원조사령부는 우리 정부당국에 농사교도사업기구 설치 추진을 건의하여 4-H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농림부 농정국 농업경제과에서는 전국에 4-H를 조직 육성하기 위해 부산 동래에서 제1기 농업지도요원 강습회를 개최해 여기에 참석한 지도요원들에게 시군단위에서 몇 개씩의 4-H회를 조직 육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4-H구락부 조직은 초보적인 것이어서 4-H회에 가입한 회원들은 연령은 남녀 할 것 없이 30세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형식적이나마 조직된 이들 초창기 4-H회가 2~3년 후에는 해당 지역에서 선진 시범4-H회로 육성되어 지역 내 4-H회 조직 확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초창기 각 지역에서 선도적으로 조직되어 4-H활동을 이끌어간 곳은 서울의 상도, 우아피(신대방동), 부산에 아카데미(동래구) 등 4개 4-H회, 경기도의 정자(화성군), 파장(수원시), 강원도의 후평(춘천시), 충북의 위전, 충남의 도고(예산군), 전북의 청북(완주군), 전남의 호두(광주시), 경북의 구암(달성군), 경남의 경화동(창원군) 제주의 다호(제주시) 등 모두 70여개의 모범 4-H회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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