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1 격주간 제703호>
<4-H 역사 속으로…> 전쟁 폐허 속에서도 살아난 끈질긴 생명력

6·25전쟁과 4-H의 수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 농촌을 재건하기 위해 4-H회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로 6·25전쟁 59년을 맞았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4-H운동도 존폐의 기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1947년에 처음 씨앗을 뿌린 우리나라 4-H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때에 전쟁을 맞았기 때문이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경기도 내 많은 4-H지도자와 회원들은 군에 입대하여 조국방위에 몸 바치고 있었으며,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자기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4-H회를 다시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경기도는 일부가 미수복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응복 산업국장과 진사성 농무과장 등 관계자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전쟁 전 경기도에서 4-H사업을 담당했었던 김갑영, 이병구 씨 등을 선봉으로 수원과 인근 수복 시군을 순회하며 단위4-H회 재건에 나섰다.
이들 초창기 지도자들은 이때부터 2~3년 간 아무런 보수도 없이 4-H재건사업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1951년 2월 유엔군이 한강 이남지역을 완전 탈환하자 국제연합 한국민사원조사령부 경기도지부는 천안에서 수원으로 이전하여 즉시 수복지구의 복구사업에 나섰다. 이때 우리나라에 4-H운동을 권장했던 앤더슨 대령과 미국 민간인 쎄리(국제연합 한국민사원조사령부 식량농림국 근무)는 직접 경기도 내의 수복지구 농촌실정을 파악하고 4-H회 재건에 대해 도청 4-H관계관들과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후 쎄리, 김갑영, 강건주 씨는 인근의 화성, 평택, 안성, 광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4-H활동을 권장하였다.
그 결과 1952년 5월 수복 후 처음으로 도내 4-H회원들을 안양에 있는 경기도종축장에 초청해 경기도농촌청년구락부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4-H이념과 4-H서약 및 4-H노래 제창이 있었고, 축산(양계, 양돈)에 대한 야외교육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강이남지역의 4-H회는 70%가 회복되었고, 한강 이북지역은 약 40%가 6·25전쟁 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 성과는 당시 농촌청소년들이 낙후된 우리의 농촌을 처참한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재건시켜 잘 살아보겠다는 굳센 신념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들어온 4-H운동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아 4-H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 바탕 위에 국가발전을 이뤄냈던 것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4-H의 끈질긴 생명력과 반드시 꽃을 피우고 마는 희망의 네 잎 클로버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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