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5 격주간 제702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22)

대청댐과 대청호와 금강  ①
 박태순 / 소설가

영남대로, 삼남대로, 서관대로(의주로), 북관대로(북로)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9대로는 역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묻고 싶은 것은 있다. 근대교통체계가 이러한 9대로의 체계를 철저히 배제하였던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9대로가 지녀온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를 산업기술문명에 순기능으로 접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뒤늦게나마 찾아볼 수는 없을까 하는 반문이다.
9대로는 육로만 아니라 수로를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전통시대의 수운(水運)은 근대로 들어서면서 완전히 맥을 놓아버리고 만다. 북한강·남한강의 뱃길은 물론이지만 금강, 낙동강, 영산강의 뱃노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장강대하의 서사담론은 사라지고 강물은 다만 수자원의 대상이 된다. 1966년에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해 8월 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법’이 제정 공포된다. 4대강의 수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전담부서가 세워져 각종 댐들의 시공과 함께 토건개발시대가 본격화된다. 1967년 4월에 소양강다목적댐 건설공사가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준공되고 연이어 4대강에 댐들이 들어찬다. 낙동강의 안동댐(1976. 10 준공), 영산강의 장성댐(1976. 10), 금강의 대청댐(1979. 12. 4), 남한강의 충주댐(1985. 10), 섬진강의 주암댐(1992. 12), 금강의 용담댐(2001. 12)이 이러한 개발계획에 따라 건설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 또 다른 소식을 만나게 된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것인데 이러쿵저러쿵 찬반 여론이 들끓고 있다. 22조원 투자의 대단히 거창한 국가사업이라 하기에 1966년부터 시작된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우선 지적해두고자 하는 것은 국토의 치산치수 사업이야말로 백년대계, 아니 천년대계의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4대강의 여러 댐 건설들은 수자원 개발과 관리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이 있으나 이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부작용들도 있었다. 대청댐의 경우를 통해서 개발만능주의 연대기의 거대토목공사가 어떠한 한계와 모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살펴본다.
대전과 청주의 첫 글자를 따서 ‘대청’이라는 합성어를 붙인 댐으로 인해 인공호수가 조성되었으니 곧 대청호이다. 대전과 청주의 어느 쪽에서 진입하든 호반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지만, 대청댐 탐구에는 감동만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이 요청된다. 토건 전문 용어로는 ‘하천 유수의 전환 공사’라 한다는데 댐의 건설로 인해 401km에 달하는 금강 물줄기의 흐름이 끊기고 잠기는 상황을 만나게 했다.
더구나 금강은 한강이나 낙동강과는 달리 수로가 대단히 복잡한 곡류(曲流)이다. 상류 쪽으로는 구배도 높은데 배불뚝이 모양의 호반은 유속이 아주 느리기만 하다. 전문가의 조사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유입된 물은 댐 아래로 빠져 나가기까지 200일 가량 머무르게 된다 한다. 이런 까닭에 ‘크게 맑은(대청)’ 호수는 전혀 아니게 되고 도리어 수질오염과 생태보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댐 건설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자원’의 경제성을 위한 방편이며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종합적인 환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건설을 위한 건설’의 조급성에 매달렸던 측면은 없었던 것인가 되돌아 살펴보아야 할 까닭이 있다. 대청댐 건설은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지만, ‘필요’에 치중하느라 ‘충분’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채 ‘압축건설’이 되어버린 측면이 있었다.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 입구 쪽에서 바라본 대청댐. 대전과 청주의 첫 글자를 따서 대청댐이라 이름 붙였는데, 대청호는 '크게 맑은' 인공호수가 전혀 아니고 수질오염이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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