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1 격주간 제701호>
<4-H 역사 속으로…> 한국새마을청소년후원회로 명칭 변경

4-H육성강화방안(4)

1986년에 열린 한국새마을청소년후원회 이사·기금관리위원 연석회의.
4-H육성강화방안은 당시 4-H운동 민간추진 기구였던 한국4-H연맹을 1979년 2월부터 한국새마을청소년후원회로 개칭하고 그 기능을 보강토록 했다. 4-H연맹은 1954년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란 이름을 달고 4-H운동 민간총괄추진기구로 발족되었으며, 1974년 4-H연맹으로 바꾸었다가 이때 다시 명칭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강화방안에서는 후원회의 특별회원은 40개 업체에서 100개 기업체로 확대키로 했으며, 운영자금은 그때까지 국고보조나 농협지원에 의존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4-H기금의 과실금으로 자립운영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또 사업도 크게 확충해 월간으로 발간하던 4-H소식지의 부수를 대폭 증간했다. 국제기술교환생은 당시 5명에서 20명으로 늘려 미국과 대만으로 파견하고 4-H해외농업연수훈련을 재개해 연간 45명씩 선발, 일본과 뉴질랜드, 덴마크에 파견하기로 했다.
4-H수용품 사업도 그 품목을 다양화하고 4-H교육사업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키로 했다.
그런데 2년 후인 1981년 새마을청소년회중앙연합회가 창립돼 곧바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였고 새마을본부에 청소년새마을국을 설치했다. 그러나 관장업무의 범위, 소요예산의 확보, 기능수행의 한계 등 여러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농촌진흥청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한국새마을청소년후원회 실무자들과 수차례에 걸쳐 업무이양의 범위 등에 대해 협의를 한 결과 1983년 3월 1일자로 후원회 업무 중 청소년소식지 발간, 국제기술교환훈련사업, 수용품 보급사업, 사례집 발간사업, 교육행사 등을 이양키로 했다. 또 이 업무를 담당하던 상근직원 3명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청소년새마을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과정에 많은 반대와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소위 새마을사태와 정치사회적인 격동기를 거치면서 1988년 10월 4-H명칭을 되찾아 다시 한국4-H후원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또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새마을청소년국이 폐지되고, 이관되었던 업무들도 5년 만에 다시 되돌려 받아 추진하게 되었다. 2년 뒤인 1990년에는 한국4-H회관이 준공돼 사무국을 4-H회관으로 이전했고, 2000년대 들어서 4-H민간추진을 강화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4-H본부로 명칭을 다시 바꾸고 4-H동문회의 성격이 강했던 4-H연맹, 크로바동지회와 통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4-H활동 육성법이 제정돼 이 법에 의한 주관단체로 4-H육성을 책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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