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5 격주간 제700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19)

영남대로 옛길, 죽령 주막거리 ⑵
 박태순 / 소설가

1566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66세 나이의 이황은 안동 예안 고향을 벗어나 서울 길에 올랐다. 하루 빨리 상경하여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종 임금의 어명이 거듭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병록(道病錄)’이라는 기록을 이 때에 이황이 남겼는데 길에서 병을 얻게 된 사정들을 적어놓은 일종의 일기장인 셈이었다.
그 속에 죽령 고개를 넘으려 하면서 쓴 7언 절구가 들어 있다. ‘이월초육일 대풍설(二月初六日大風雪)’이라는 제목인데 2월 6일 큰 눈바람을 만났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 시는 첫 구에서 ‘설령(雪嶺) 아아(峨峨) 재반공(載半空)’이라 읊고 있다. 눈 덮인 고개(설령)가 험하디 험하게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는 탄식이다. 이어서 ‘음풍(陰風) 여축(如逐) 만우웅(萬牛雄)’이라 했다. 음산한 바람 소리(음풍)는 1만 마리 황소가 떼를 지어 울부짖는 것과 같은 형세라는 것이었다.
눈 덮인 죽령 고개의 까마득함, 거기에 황소울음 소리의 거센 바람을 만난 66세의 이황은 어찌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상경하라는 어명을 제발 거두어 귀향하게 해주시라는 것이었다. 이 시는 ‘백병(百病) 고신(孤臣) 정갈충(正渴衷)’이라고 매듭을 짓고 있었다. 100가지 병을 한꺼번에 앓고 있는 외로운 신하가 임금께 간절하게 하소연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황은 이 때에 죽령 고개를 넘지 아니하고 회향하였다.
해발 689미터 높이의 죽령은 서기 158년 3월에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길을 내었다고 기록된다. 계립령과 함께 죽령은 백두대간 줄기가 막아놓고 있는 국토 중앙지대의 남북 분단 상황을 간신히 뚫어놓고 있었다. 한국역사에서 가장 오래 된 옛길이고 선비들의 애환이 서린 영남대로의 길목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죽령은 퇴계 이황이 묘사한 험악한 고갯길의 풍경과 같은 것을 도무지 실감하지 못하게 한다. 근대교통체계는 죽령을 아예 험산준령으로 치부하려 하지조차 않는다. 1941년에 중앙선철로가 똬리굴을 뚫어 소백산을 관통시켰고, 1971년에는 5번국도가 소백산 산복도로를 개통시켜 단양 용부원 주막거리와 영주 무쇠다리 주막거리를 자동차길로 만들었다. 경사가 급한데다가 노폭마저 좁아 난코스를 이루기는 했다. 소백산을 넘는 데에는 자동차로서도 한 시간 가량 걸리던 것이었는데, 고속도로 토목기술이 이를 모른 체 할 수 없다. 2001년 12월 제천-단양-영주-안동 구간의 4차선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4.5km 길이의 국내 최장 터널이 단숨에 옛 고갯길의 역할을 대체해버린다. 소백산 통과 시간을 10분 이내로 단축시켰으니 대단한 효율성을 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교통능력과 기술의 예찬으로 옛 고개 죽령의 이야기는 모두 마감되고 소멸되어버리는 것일까. 퇴계 이황의 죽령 시를 다른 관점에서 읽어볼 필요도 있다. 그는 죽령 겨울 자연환경이 험준함을 읊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서울 조정이 난신적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 온갖 폭정이 자행되고 있으니 왕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정도(正道)를 가고자 하는 이황은 죽령고개를 넘지 않고 되돌아섬으로써 서울의 정치가 사도(邪道)에 휩싸여 있음을 온몸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죽령고개는 그냥 뜨내기 나그네의 주막거리 풍경만은 아니었다. 영남선비의 도의와 염치를 지켜주었던 고갯길이었다. 이황의 도병록(道病錄)은 신체의 질병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회 도리의 질병상황 고발 기록 같기만 하다.

경북 영주 쪽에서 바라본 소백산 죽령 일대의 일출 풍경(사진 황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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