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5 격주간 제700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백성들에게 도적이라고 불린 과천현감

조선 시대에 ‘목사로는 의주목사요, 현감으로는 과천현감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워낙 재물이 많이 생기는 수령 자리라고 해서 생긴 말이다. 의주는 압록강을 통해 수많은 재목이 뗏목으로 운반되는 곳이고, 과천은 시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수령들은 멋대로 세금을 매겨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의주목사는 압록강에 넘치는 뗏목에 일일이 세금을 붙여, 엄청난 재물을 거두어들였다. 과천현감 또한 과천이 서울의 관문이라는 것을 이용해, 어수룩한 시골 사람들에게 ‘입경세’라는 것을 받았다. “서울로 들어가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 통행세를 내라.”하면서 말이다.
자기 고을 수령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붙여 재물을 모으는 데 열을 올리니, 그가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도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해인가, 과천현감이 다른 고을 수령으로 가게 되었다. 이 사람은 입경세뿐 아니라 자기 고을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악질 사또라고 모두들 이를 부득부득 갈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자기 고을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백성들이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 주는 풍습이 있었다.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덕으로 잘 다스렸다’ 등의 구절을 넣어서 말이다. 이름하여 ‘송덕비’였다.
실제로는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노략질을 일삼았으면서도 많은 지방 수령들은 자기가 있던 고을에 송덕비를 세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심복 부하들을 시켜 송덕비를 세우는 일도 아주 흔했다고 한다.
아무튼 과천현감은 관가를 떠나 비석거리에 다다랐다. 비석거리는 역대 현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 많이 서 있는 곳이었다. 과천현감은 자기를 위해 세워진 비석을 발견하고 입이 함박 만해졌다.
그 비석은 과천현감의 손길을 기다리며 종이에 싸여 있었다. 관례에 따라 제막식이 열려, 과천현감은 종이를 벗겨냈다. 그런데 비석을 들여다본 그는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비석에는 ‘오늘 이 도적을 보낸다’라고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과천현감은 탐관오리이긴 하지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큰 소리로 껄껄 웃더니, 비석에 새겨진 글에 이어 이런 글을 적었다.

“내일은 또 다른 도적이 올 것이다.
앞으로 도적은 끊임없이 올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도적이니 어찌하랴.”

도적을 고을 수령으로 섬겨야 했던 백성들의 처지가 오죽했겠는가? 탐관오리를 만나면 고통 받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권세 있는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더 좋은 자리로 옮겨 가려고, 그들은 나라의 재물을 훔치고 백성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했으니까.
 〈신현배 / 아동문학가, 시인〉

♠ 세도 정치를 했던 권신의 집에는 지방 수령들이 바친 뇌물을 따로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면서요?

조선 후기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를 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갖고 있던 사람은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였다.
이 세 재상은 대사동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나란히 붙어살았다.
이들 집에는 날마다 지방 수령들이 보내오는 뇌물로 차고 넘쳤다.
전국에 360여 개의 군이 있으니, 방방곡곡에서 날아드는 물건을 감당하지 못해 따로 창고를 지어 보관해야 했다.
재상들의 집에는 먹을 것이 남아돌아, 말이나 나귀는 귀한 약밥을 날마다 먹었다고 한다.
특히 김병기의 말은 하도 좋은 것만 먹어, 최고급 과자인 약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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