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야생 원숭이가 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충청남도 부여군 조촌면 소사리에는 야생 원숭이에 얽힌 ‘원숭이 못’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시대 충청도 부여 땅에 사냥꾼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냥꾼은 날마다 깊은 산 속을 다니며 동물들을 사냥했다. 어느 날, 사냥꾼은 나무그늘에 앉아 울고 있는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새끼원숭이가 불쌍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온 정성을 다해 키웠다.
원숭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는 주인의 얼굴을 알아보아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가 하면, 사냥꾼의 아기를 혼자서 봐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냥꾼의 아내가 빨래를 하러 간 사이, 원숭이는 집에서 아기를 봐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숭이는 부뚜막에서 뜨거운 물을 떠와 빨래하는 흉내를 내다가 뜨거운 물을 아기의 몸에 엎지르고 말았다. 아기는 숨넘어갈 듯이 울었고, 놀란 원숭이는 아기를 안고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사냥꾼 부부는 아기와 원숭이를 찾으려고 마을 근처에 있는 산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부부는 며칠을 헤맨 끝에 어느 골짜기 연못에서 아기를 발견했다.
사냥꾼 부부는 너무 반가워 연못가로 달려가 아기를 덥석 안았다. 그러자 깜짝 놀란 원숭이들은 숲 속으로 모두 도망쳤다.
그 연못은 무슨 상처든 깨끗이 낫게 하는 연못이었다. 원숭이는 뜨거운 물에 덴 아기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 연못으로 왔던 것이다. 그 뒤부터 이 연못은 원숭이들이 있던 연못이라고 해서 ‘원숭이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전설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에 이곳에는 원숭이들이 실제로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원숭이들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거느린 원숭이 부대에 있다가 도망친 원숭이들이다. 이 원숭이 부대는 양호의 지휘를 받아 철갑 기병 4천 명과 더불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정유재란 때 양호는 명나라 원군 10만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내려왔다. 그가 평양의 연광정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일본군이 남원에서 양원의 명나라군을 크게 이기고 올라오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양호는 저녁밥을 먹다 말고 병사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려 급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양호는 충청도 직산의 소사하(지금의 안성천) 다리 밑 들판이 끝나는 곳에 철갑 기병 4천 명과 말을 탄 원숭이 수백 마리를 숨겨 놓았다. 이윽고 일본군이 직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와 100여 보 되는 곳에 이르자, 명나라군은 말을 탄 원숭이들을 풀어 놓았다. 원숭이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일본군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일본군 병사들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어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원숭이들은 곧 말에서 내려 일본군 진영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제야 일본군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원숭이들을 잡으려 했지만, 일본군 진영은 금방 혼란에 빠졌다. 명나라군은 이 틈을 타 총공격, 일본군의 시체는 온 들판을 뒤덮었다.
원숭이들을 이용해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이 이야기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원숭이는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왔나요?”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연의 ‘삼국유사’에 원숭이가 나오기 때문에, 삼국 시대 왕실에서 원숭이를 애완동물로 길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이차돈이 순교할 때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는데, “샘물이 갑자기 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오르고, 곧은 나무가 부러지니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울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기상 서택에서 노한 원숭이를 보고 짓다’라는 시를 보면 고려 시대에도 원숭이를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1394년(태조 3년) 6월 왜구들이 납치한 조선인 650여 명을 돌려보낼 때, 일본 사신이 원숭이 한 마리를 태조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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