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1 격주간 제693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임진왜란이 후추 때문에 일어났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 때의 명신인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서 정부를 이끌고 민심을 잘 수습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남겼다. 그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노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 조선을 방문했다’라는 글로 시작되는데, 앞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66주를 통일하고 권력을 잡은 뒤 조선에 야스히로를 사신으로 보냈다. “일본은 조선에 자주 사신을 보냈는데,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이 일본을 업신여기기 때문 아닌가?”라며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야시히로를 조선으로 보낸 진짜 이유는, 조선 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야스히로 일행이 서울에 도착하여 예조판서가 환영 잔치를 베풀었을 때의 일이다. 술에 취한 야스히로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후추를 꺼내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악공, 기생 할 것 없이 달려들어 후추를 주워 담았다. 결국 잔치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야스히로는 숙소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규율이 이렇듯 엉망이니, 조선이 망할 날이 멀지 않았구나.”
야스히로는 곧 일본으로 돌아가 이런 사실을 도요토미에게 보고했고, 도요토미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
‘징비록’의 내용대로라면 후추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도요토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어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당시 후추는 상류층에서만 쓰는 고급 향신료였다. 얼마나 귀했던지 ‘후추는 작아도 임금님에게만 올려 진다’, ‘후추 쓰듯 정을 아껴 주라’ 등의 속담까지 생겨났다.
우리나라에 후추가 처음 들어온 때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에 1389년(공양왕 1년) 유구국에서 사신을 보내 후추 3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신안 앞바다에서 후추 실은 원나라 배를 인양했다는 걸로 미루어 고려 중엽쯤에는 이미 후추를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후추를 재배하려고 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으니 후추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후추는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 서역의 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비단길을 통해 가져왔다고 하여, 호나라 호(胡)자를 붙여 ‘호초(胡椒)’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는 ‘후추’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추는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였다. 음식 맛을 낼 뿐 아니라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불로장생약이자 정력제로 알려져, 유럽에서는 금이나 은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후추는 인도에서 재배되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그 뒤 유럽 사람들은 후추를 직접 구하려고 인도를 찾아 나섰고, 나중에는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대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면서요?”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는 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무역 적자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본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느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복 야욕을 채우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느니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모두 타당성이 있는 학설인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학설은 1582년 일본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도요토미가 영주들의 힘을 줄이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도요토미는 힘 있는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늘 불안해했다. 그래서 그들의 재정을 축내려고 큰 성을 지었다가 부수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전쟁이기 때문에 도요토미는 영주들의 힘을 줄이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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