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리’가 중심에선 동양의 신화
나침판과 화약, 그리고 종이가 서구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동양문화는 서구문화를 앞서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서양문화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문화적 유산들을 쏟아냈다. 수많은 이야기의 재료들, 그리스나 로마 신화 속 전쟁, 북구 유럽의 신화들, 서구의 이야기들은 영화화 되었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양에도 ‘반지의 제왕’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동양인으로 허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오우삼 감독은 삼국지의 정수인 적벽대전을 ‘1부 거대한 전쟁의 시작’과 ‘2부 최후의 결전’으로 나눠 총 5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1부는 적벽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의 예고편이었다면, 2부는 본격적인 적벽대전에 돌입한다.
서기 208년 위, 촉, 오 삼국이 대립하던 중국 한 왕조 말기 혼란의 시대. 위나라의 조조(장풍)에게 쫓긴 유비가 제갈량(금성무)의 도움으로 오나라의 손권(장첸)을 설득한다. 결국 제갈량과 오나라의 주유(양조위)가 힘을 합쳐 적벽에서 조조의 백만대군과 마주하게 된다. 촉과 오의 연합군병력은 고작 십만. 하지만 책사 제갈량은 풍향을 바꾸고, 물위에 불을 일으켜 조조를 물리친다. 주유 역시 그런 제갈량을 도와 조조의 진영을 쳐부순다.
영화 ‘적벽대전’이 보여주는 소설과의 다른 재미는 바로 제갈량과 주유의 관계이다. 홍콩 누아르 영화를 만들었던 오우삼 감독은 주유와 제갈량의 모습에서 ‘영웅본색’, ‘첩혈쌍웅’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세계관을 녹여낸다. 원작에서는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주유와 제갈량의 관계를 서로 호의를 품은 사이로 등장시킨다. 두 캐릭터의 지략과 인품, 그리고 관계를 보여주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전쟁이 끝나고 떠날 때는 마치 허무한 전쟁 속에서 꽃피운 남자들의 우정을 대변하는 듯 하다.
오우삼 감독은 인터뷰에서 동양의 정신이나 문화를 구현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너무 신화적으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사실적으로 적벽대전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원작보다 사실에 기초해 신화의 기운을 최대한 덜어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오우삼 자신이 홍콩 누아르 시절부터 만들어왔던 ‘의’와 ‘리’의 신화 속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듯싶다. 바로 제갈량과 주유의 모습이 그가 만들었던 과거의 영화 속 인물들과 겹치고 말았다. 그리고 남자들의 의리만 존재하는 그의 머리 속을 벗어나 시대와 역사를 담아냈다고 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손광수 /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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