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5 격주간 제690호>
나의 사랑 나의 국토 ⑨

묵은해와 새해의 송구영신
 박태순 / 소설가

<회마을 겨울풍경(황헌만 사진). 전통 민속마을의 자랑만 아니라 체통을 갖춘 세시풍속과 통과의례의 무형문화유산 생활문화를 하회마을은 갈무리해 오고 있다.>
2008년이 저물어간다. 연말연시는 무사분주로 바쁘고 허전하기도 하다. 묵은해를 전송 보내어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데 격식을 갖춘 ‘송구(送舊)’와 ‘영신(迎新)’을 과세(過歲)라 했다. 섣달 동지 날부터 설날을 거쳐 정월 대보름에 이르기까지 과세는 안녕해야만 했다.
2009년의 새해맞이에 앞서 먼저 다짐해야 할 바가 있다. 망년(忘年)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단어이다.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는 도무지 가당치도 않았던 풍속이었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함부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송년(送年)의 정중한 배웅이었으며, 그에 따라 종년(終年)의 행사를 경건하게 마련해왔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정치인과 경제인부터 2008년을 함부로 ‘망년’하게 해서는 아니 될 노릇이다. 망년 파티 아니라 송년의 송별식, 그리고 종년의 종무식(終務式)으로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해야 하리라.
별세(別歲)라는 말도 쓰고 수세(守歲)라는 표현도 썼다. 지나온 한 해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별세’이고, 섣달 그믐날 밤을 꼬박 새워 새 아침을 맞는 풍속을 ‘수세’라 했다. ‘올드 랭 자인(송구)’의 자세를 바르게 갖추어야 ‘해피 뉴 이어(영신)’를 제대로 누려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는 도시가 있다. 경북 안동시가 이런 브랜드를 내세운다. 정치경제는 양보할지라도 정신문화의 중심지는 내 차지라는 것이니 이 도시의 자부가 자못 당당해 보인다. 그래서 연말연시에 더욱 돋보이는 마을이 있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의 하회마을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구세배(舊歲拜)’를 드리고 있다. 주민들은 ‘묵은세배’라는 표현을 쓴다. 대한민국 전체가 잃어버린 이런 세배를 이제껏 간직해 오고 있다.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이 새해 세배라면, “지난 1년 동안 조상님과 어른들 덕분으로 복 많이 받았습니다” 하는 감사의 세배가 묵은세배다. 양력설과 음력설의 ‘이중과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세시풍속으로 송구와 영신을 함께 누리려는 겹경사의 슬기로운 생활문화다.
두 세배의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새해 세배는 문중의 남자들만 입향조의 사당에 모여 대가족주의 행사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묵은세배는 집집마다 자기 식솔들만 오순도순 모여 도배례(都拜禮)를 드리는 소가족주의 송년 잔치이며, 물론 남녀의 차별도 없다.
“묵은세배가 미풍양속임에 틀림 없니더. 하지만도 다른 고장에서는 어림없을 것이니더.”
하회 류씨 종친회 유사(有司)를 맡아오고 있는 류시주 씨가 감개 어린 표정으로 들려주는 말이다. 한 번의 세배도 벅차하는데 두 차례 세배가 가능키나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새 등잔 세(細)발 심지 장등(長燈)하여 새울 적에, 웃방 봉당 부엌까지 곳곳이 명랑하다. 초롱불 오락가락 묵은세배 하는구나.”

‘농가월령가’는 12월의 월령을 이러한 가사로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묵은세배를 드리는 예절생활은 전국전토에서 누려오던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그리 바쁘기만 한 것일까. 미쁜 전통생활보다는 나쁜 라이프스타일이 더 우세해지는 것, 그것이 현대생활이 아닌가 반문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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