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5 격주간 제690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나라에서 춥게 해 달라는 제사를 드리다
“현명씨에게 비옵니다. 이번 겨울에도 몹시 춥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한강 얼음이 두껍게 얼게 도와주십시오.”
섣달 어느 날, 얼음 창고인 동빙고(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근처에 있는 사한단에서 담당 관리는 현명씨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진 제단 위에는 돼지머리가 놓여 있었다.
현명씨는 겨울과 추위와 얼음이 어는 것을 맡은 신이었다. 사한단에는 현명씨를 받들어 모셔, 한강 얼음이 두껍게 얼도록 올 겨울에는 춥게 해 달라고 해마다 섣달에 제사를 드렸다.
얼음 채취와 저장을 맡은 담당 관리는 동빙고의 장빙 감역관이었다. 동빙고에서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쓸 얼음을 저장했다.
그리고 한강 둔지산에 있는 서빙고(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에서는 왕족이나 백관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저장했고, 궁궐 안에 있는 내빙고에서는 임금에게 바칠 얼음을 저장했다. 저장하는 얼음의 양은 동빙고가 1만2044정, 서빙고가 13만4974정, 내빙고가 4만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추운 겨울에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얼음 창고인 빙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꺼내 쓰곤 했다. 나라에서 제사를 드릴 때 얼음이 쓰이기 때문에 조선의 왕들은 얼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빙고에 얼음이 얼마나 남아 있고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직접 보고를 받았다.
섣달에 현명씨에게 제사를 올리고는 빙고 근처에 사는 백성들과 군인들을 동원해 한강 얼음을 깨어 빙고까지 옮겼다.
그런데 그 일이 어찌나 힘들고 고된지 한강 얼음이 얼 때쯤이면 빙고 근처의 마을 장정들이 밤에 몰래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겨울에 생과부가 되어 버린 여인들은 ‘빙고 청상’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얼음을 옮겨 빙고에 보관해 두면, 춘분에 또 현명씨에게 ‘개빙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빙고 문을 열고 얼음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서빙고 문을 열어 언제, 누구에게 얼음을 나누어 줄지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에 따르면 5월 보름에서 7월 보름까지는 홍문관, 승정원, 비변사, 시강원, 춘추관, 내병조, 내의원, 양현고 등에 얼음을 나누어 주고, 6월 초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는 왕족 종친과 문무 당상관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의료 기관인 활인서의 환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에 갇힌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죄수들에게 얼음을 주어 먹이는 것은 그들 몸속에 서린 악한 기운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나라에서 얼음을 나누어 주는 날은 축제일과 다름없었다. 신하들은 얼음을 집에 가져와 온 가족이 즐겁게 골고루 맛보았다. 그러나 뜻있는 관리는 빙고의 얼음을 누빙, 즉 ‘백성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겨울이 춥지 않아 한강이 얼지 않는 해에는 어떻게 얼음을 얻었나요?”

한강이 얼어붙지 않으면 얼음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때는 왕이 직접 춥게 해 달라고 ‘기한제’를 올렸다. 그런데도 추위가 몰려오지 않으면 찬밥이나 언 음식을 챙겨 먹으며, 현명씨에게 온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얼음이 얼지 않으면 어떻게 했을까? 마지막 수단으로 산골에 가서 얼음을 채취해왔다. 얼음을 옮기는 것이 무척 힘들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지역의 산골을 주로 이용했다. 운반이 어려우면 그 곳에 창고를 지어 얼음을 저장하기도 했다.
1462년(세조 7년)에는 겨울이 춥지 않아 한강이 꽁꽁 얼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각도 관찰사에게 얼음을 구하라는 명을 내리고, 얼음을 얻기 위해 장빙사를 파견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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