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예던 길
박태순 / 소설가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찌할꼬.’
〈현대어 표기〉
퇴계 이황(1501~1570)은 위대한 도학자이면서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인이었다. 그는 동시에 위대한 문학인이었다. 퇴계의 한글 시조 ‘도산12곡’과 한문으로 씌어진 한시 ‘도산9곡’은 그의 고향마을인 도산 일대의 서경(敍景)을 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조로운 음풍명월의 시인은 아니었다. 산수의 맑음과 심성의 밝음을 끊임없이 함께 추구하였다.
안동시는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면 토계리에서 가송리를 거쳐 청량산에 이르는 낙동강 구비구비 애도는 숲길을 ‘퇴계 예던 길’이라 이름 붙여 문화역사 생태 탐방로를 조성해놓고 있다. 추운 겨울철이기는 하지만 청량(淸凉)의 청량산과 도산 일대를 답사하는 데에는 도리어 상쾌한 계절이 되기도 하겠다. 이육사 시인의 표현대로 하자면 ‘강철로 된 무지개’같이 견고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겨울이 아닌가(이육사 시인은 퇴계의 14대 후손으로 도산서원 강 건너 쪽에는 그의 생가 기념관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퇴계 예던 길’을 찾아나서 보라. 퇴계의 시조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다. 퇴계 예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예고 어찌할꼬.
청량산과 도산의 낙동강 강변길은 호젓하면서 애틋하다. 이런 비경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찬탄을 금할 수 없는 만고강산의 경관을 펼쳐 보이고 있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어부) 알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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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예던 길’. 도산면 가송리에서 청량산 들머리로 들어가는 낙동강 굽이길에는 만고강산의 사색과 명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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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상 육육봉은 66봉 아니라 12봉을 가리킨다. 10대의 소년시절에 이황은 이 산에서 글공부를 하던 집을 ‘오산당(吾山堂)’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청량산은 퇴계에게 ‘나의 산’이었던 것(퇴계의 이 시조를 지난 회의 남명 조식의 ‘두류산 양단수’ 시조와 비교해보라).
도산서원 찾아가서는 동쪽 산의 천연대(天淵臺)와 서쪽 산의 운영대(雲影臺)를 꼭 올라가보아야 한다. 하늘 위로 솔개가 날고, 물속에 물고기 뛰노는 것을 함께 관조하면서 16세 소년 이황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의 이치를 함께 꿰뚫어보았던 것인데 바로 그러한 문화경관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애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참살이의 도리…. 이 겨울에 퇴계 예던 길에서 그러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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