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년 5월의 어느 날 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이 갑자기 죽었다. 고국천왕은 왕비 우씨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다음 왕은 고국천왕의 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왕비 우씨는 왕의 후계자를 자기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국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한밤중에 첫째 시동생인 발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아직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왕위를 물려받아야겠습니다.”
왕의 죽음을 모르는 발기는 왕비의 말을 듣고 혼자 생각했다.
‘왕비가 나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그래서 발기는 노기 띤 목소리로 엄하게 말했다.
“하늘이 정해 준 뜻을 왜 사람이 거스르려 하십니까? 그리고 부인의 몸으로 늦은 밤에 궁궐 밖을 돌아다니다니요? 이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형사취수제 결혼풍습
발기에게 무안을 당한 왕비 우씨는 그 집에서 나와 둘째 시동생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대문 밖까지 나와 왕비를 정중히 맞아들이고,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려 후하게 대접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왕비 우씨는 연우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그 뒤를 이어야겠습니다. 그 대신 저를 왕비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연우가 승낙하자, 왕비 우씨는 이튿날 아침 신하들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고 거짓으로 꾸민 유언장을 공개했다. 그 유언장에는 왕위를 연우에게 물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하여 연우는 우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 형수를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분이 바로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이다.
연우가 형수인 우씨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구려에는 ‘형사 취수제’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 취수제란,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다.
미망인 여성노동력 활용
이러한 풍습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흉노 등 북방 유목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유목 민족들은 전쟁을 자주 치렀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이 많이 생겼다. 따라서 이들을 집 안에서 돌봐주어야 하고, 또 남편 없이 살게 할 수 없어 시동생과 결혼을 시킨 것이다.
미망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은, 자기 집안에 들어온 여성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아서다. 당시에 여성들은 힘든 가사 노동을 했으니, 미망인을 시동생과 결혼시킴으로써 값진 여성의 노동력을 집안에 묶어 둘 수 있었다.
형사 취수제는 고구려 초기 사회에 흔히 행해지다가, 결혼 풍습이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바뀌는 중기 이후에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고구려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 밖에 꿇어앉아, 신부와 “재워 달라고 장인 장모에게 빌었다면서요?”
고구려에는 형사 취수제와 함께 ‘서옥제’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서옥은 ‘사위 집’을 뜻하는데, 신부 집 뒤쪽에 지어 놓았다.
결혼을 하기로 결정되면,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술과 돼지고기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는 신랑이 저녁에 신부 집으로 가서 대문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 이름을 대고 절을 하며 이렇게 빌었다.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게 해 주십시오.”
두세 번 청한 끝에 장인 장모가 허락하면, 그제야 신랑 신부는 서옥으로 들어가 첫날밤을 보내고 그 곳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뒤에야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니, 고구려에서는 남자가 결혼하기 정말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결혼하기 전 신랑이 신부집에 함을 팔러 가는데 이런 풍습이 발전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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