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1 격주간 제685호>
<별난 한국사 이야기> 일본인들에게 도굴당한 수백만 점의 고려자기
고려청자는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였다. 요나라 공주의 무덤에서 고려청자가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송나라 말기의 학자 태평 노인은 ‘수중금’이라는 글에서 “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절강의 차, 고려의 비색 등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남들이 모방하려고 해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천하 명품으로 이름 높았다. 비색이란 청자의 푸른색으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고 높이 평가되었다.
이렇듯 훌륭한 명품 고려청자도 조선시대에까지 전해져 온 것이 거의 없었나보다. 일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시켜 창덕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고종은 이토와 함께 처음으로 박물관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청자들을 보고 이토에게 물었다.
“이 청자들은 어느 나라 것이오?”
“예. 고려의 것입니다.”
“뭐라고? 고려청자라고? 우리 조선 궁중에는 고려청자가 남아 있지 않은데, 이 많은 고려청자를 어디서 가져왔소?”
“예, 그게 저…….”
이토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그도 그럴 것이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들은 일본인들이 개성 일대의 왕릉을 비롯한 고려 옛무덤들을 마구 파헤쳐 얻은 것이었다. 그렇게 약탈한 고려자기들을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대한제국 황실에 비싼 값에 팔아 넘겼던 것이다. 박물관에는 6562점의 고려자기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개성에서 불법으로 도굴된 것이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한반도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건너왔는데, 그 가운데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개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천 개의 고려 옛 무덤들을 파헤쳐 고려자기들을 닥치는 대로 캐냈다. 그렇게 얻어진 고려자기는 일본인 고려청자 수집가나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가 모두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일본 본토에서는 상류층이나 부자들 사이에 고려자기를 수집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1911~1912년에는 고려자기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고려자기를 도굴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는 개성 지역을 벗어나 강화도, 해주 방면으로까지 가서 고려 옛 무덤을 닥치는 대로 파헤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옛 도자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도굴한 고려자기가 수백만 점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자기뿐 아니라 불상, 그림, 범종, 석탑, 서책 등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우리 조상들이 왜 일본인들을 미워했는지 그 이유를 알만하다. 
 〈신현배 / 시인, 아동문학가〉

♠“이토 히로부미도 고려자기 수천 점을 일본으로 빼돌렸다면서요?”

1905년경에 서울 충무로 입구에는 ‘곤도’라는 일본인의 골동품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굴꾼들이 팔아넘긴 고려청자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가게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났다. 이토는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여기에 있는 고려자기를 나한테 몽땅 파시오” 하고 말하는 거다.
이렇게 이토가 고려자기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서울 장안에는 한동안 고려자기가 동이 났다고 한다. 이토는 다른 골동품 상인에게도 자주 가서 “고려자기가 있으면 다 가져와. 내가 몽땅 살 테니까.”하고 말하며 고려자기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단다.
이토는 왜 고려자기를 잔뜩 사들였을까? 그것은 일본 본토의 고위층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최고급 고려자기 103점을 바치고, 고위 정치가나 귀족들에게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 빼돌린 고려자기가 수천 점이나 된다니, 이토야말로 우리 문화재 약탈의 원흉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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